연암 박지원의 ‘우주인 이야기’[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청나라를 출장 중이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달을 보고 있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음력 8월 13일이었다. 박지원은 자신과 함께 달을 바라보던 기풍액(奇豊額)이라는 조선 출신 관리에게 말을 불쑥 던졌다.“사람들은 어째서 지구가 모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지구가 모나다면, 월식 때 달 가장자리에서 어두워지는 그림자는 왜 둥근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지구가 돌고 있다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며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주
[논객칼럼=김부복]어떤 일본 사람이 만주 벌판의 혹한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일본보다 위도가 높은 만주 벌판은 무척 추웠을 것이다.“산천초목이 모두 얼어붙었다. 무엇이든 얼어버렸다. 날달걀은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마음대로 자를 수 있었다. 파는 마른 나무처럼 뚝뚝 부러졌다. 잉크도 양젖도 석유까지도 얼었다.… 밖으로 나오면 콧구멍이 얼었다. 눈을 감으면 위와 아래의 눈꺼풀이 달라붙었다. 길을 가는 사람은 수염이나 턱에 고드름을 늘어뜨렸다.…”그런데 ‘지구온난화’는 만주의 기온도 올려놓을 참이다. 몇 해 전
[논객칼럼=김부복]돌이켜보면,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요란했다.대한민국 정부는 ‘한국판 경제개발 비법 교과서’를 만든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우리 경제의 발전 경험을 개발도상국에게 체계적으로 전수하기 위한 ‘교과서’라고 했다.6·25전쟁 참전국에게 경제 발전 경험을 전수하고, 공적개발원조 확대 계획도 내놓고 있었다. “개도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국제사회에 걸맞은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그해 연말 무렵에는 경제 분야의 ‘바이블’이라는 ‘한국 경제 60년사’를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 강만수 ‘대통령 경제 특별보좌관 겸 국가경쟁
[논객칼럼=김부복]한나라 장군 한신(韓信)의 ‘배수지진(背水之陣)’은 유명하다.한신은 조나라와 싸울 때 부하 장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면서 강을 등진 채 배수진을 치도록 했다.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그리고 한바탕 전투 끝에 패한 척하며 후퇴했다. 배수진을 치고 대항하는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들이 적의 성을 점령, 한나라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훗날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배수진을 이렇게 평가했다.“한신이 배수지진을 쓴 것은 상대 장수인 진여(陳餘)가 백전노장이라 실패할 진세로 유혹하지
[논객칼럼=김부복]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교외에서 말을 타고 눈길을 달리다가 생각을 떠올렸다. 고기를 눈 속에 묻어두면 얼마나 상하지 않게 보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베이컨은 생각난 김에 실험해보기로 작정하고 근처 농가에서 닭 한 마리를 샀다. 그 닭의 배를 가르고 눈 속에 묻었다.그러는 사이에 베이컨은 몸이 으스스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감기였다. 그 감기가 심했던지 몹시 아팠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가까운 집으로 옮겼다. 베이컨은 그 집에 누워서 “실험이 훌륭하게 성공된 것 같다”고 썼
[논객칼럼=김부복]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경주에서 왕릉급 고분을 발굴하던 학자들이 ‘청동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만세’를 불렀다.항아리 밑바닥에 1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16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었다. 그 글자 가운데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이었다.당시의 고분 발굴은 일본이 패망해서 자기 나라로 쫓겨난 뒤, 순전히 우리 기술로 시도된 첫 발굴사업이었다. 그 첫 발굴에서 일본이 눈에 불을 켜며 뒤지고도 발견할 수 없었던 광개토대왕이
[논객칼럼=김부복]한겨울에는 유도복을 입을 때마다 많이 껄끄러웠다. 웃통을 홀랑 벗은 채 ‘맨몸’에 도복을 걸쳐야 했기 때문이다.넓은 도장에는 ‘난방시설’이라는 게 없었다. 웃통을 벗으면 소름이 돋고 살이 오그라들었다. 덜덜 떨면서 도복을 입어야 했다. 그 도복이 가끔 속을 썩이기도 했다. 전날 흘린 땀이 밤새 얼어붙어서 도복에 살얼음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조금 더 끔찍했다.유일한 해결책은 ‘마찰’이었다. 도복을 입으면서 양쪽 끝을 왼쪽, 오른쪽으로 여러 차례 잡아당기며 ‘맨살’과 마찰시킨 것이다. 그 마찰로 ‘열’을
[논객칼럼=김부복]1124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외모’를 “체구가 크고 얼굴이 검고 눈동자가 불룩한 모습”이라고 적었다. 사신은 그러면서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많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학자로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알다시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책임자다.그러나 김부식은 자신의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 그 바람에 사신의 기록과 달리 존경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윤관(尹瓘)은 북방민족을 여러 차례 다스린 명장이었다. 여진족
[논객칼럼=김부복]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은 ‘삼한일통’의 주요 역할을 한 사람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 있다. 손바닥만 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거꾸러뜨린 것은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삼국사기에도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 누구보다 많다. 김유신은 ‘영웅’이었다.그렇지만 당한 입장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눈에는 영웅으로 보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의 피(血)와 뇌(腦)를 산과 들에 뿌리게 한 ‘간웅(奸雄)’이라고 부
[논객칼럼=김부복]매천 황현(黃玹∙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얘기다.“남인 최우형(崔遇亨)은 잇달아 청직(淸職)에 발탁되어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봉군 등의 요직을 거쳐 충훈부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 수레를 타고 북촌(北村)에 도착하여 코를 가리며, ‘노론의 냄새가 어찌 이리 고약한가’ 하였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노론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三色黨)이 살고 있었다.”황현은 나라가 기울던 조선 말 사람이었다. 당시
[논객칼럼=김부복] 서기 668년은 ‘치욕의 해’였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의 군사들에게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그렇지만 고구려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임금은 항복했어도 백성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단군 이래 3000년이나 만주벌판을 차지했던 백성이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백성은 망할 수 없었다.특히 안시성의 저항은 대단했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쳐들어왔다가 눈알을 잃고 피눈물을 뿌리며 달아났던 곳이다. 이세민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논객칼럼=김부복]1993년 7월, 일본 요미우리신문 오사카 판에 기사 하나가 크게 보도되었다. ‘머리기사’였다. “만요(万葉) 사람들은 무궁화를 좋아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나라 시대 일본의 수도인 헤이죠오코에서 귀족들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피는 꽃인 무궁화를 관상용으로 재배했었다는 사실이 텐리 대학 학예원의 카네하라 마사아키 씨의 화분 분석 조사 결과 밝혀졌다. 당시 무궁화는 일본에서는 자생하지 않았고 도래시기도 확실하지 않았으나 나라 시대에 이미 대륙으로부터 묘목을 수입해서 귀족들이 정원에 재배하고 이국의 정서를 즐긴 듯
[논객칼럼=김부복]잘 알려진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를 돌이켜보자.한나라 임금 유방이 어느 날, 신하인 한신과 얘기를 하다가 불쑥 물었다.“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한신이 말했다.“임금께서는 10만쯤 거느릴 수 있는 장수입니다”유방이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는가”한신이 대답했다.“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유방이 또 물었다.“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10만밖에 거느릴 수 없는 내 밑에 있는가”한신이 또 대답했다.“임금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논객칼럼=김부복]백인들은 매독의 ‘기원’을 서인도제도라고 주장했다. 서인도제도의 원주민과 성 접촉을 하게 된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고 우겼다.매독의 ‘원조’가 서인도제도였다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상당수가 매독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서인도제도에서 북미 대륙으로 병균을 옮겨온 백인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매독에 감염되고 있었다.그런데도 매독은 ‘야만인 병’이었다. ‘못된 병’은 모두 유색인종이 옮기는 것이었다. 백인들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런 발상이 머리 꼭대기부터
[논객칼럼=김부복] ‘어진 임금’ 정조는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를 각별하게 아꼈다. 임금이 직접 박제가의 집을 방문할 정도였다. 정조는 박제가의 집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 ‘어애송(御愛松)’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임금이 사랑하는 소나무라는 뜻이다.박제가는 젊었을 때 저술한 ‘북학의(北學儀)’를 요약, 정조에게 건의했다. 청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했던 박제가는 경제부터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를 비롯한 모든 나라와의 교역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시장개방’을 주장한 것이다.청나라에 있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논객칼럼=김부복] “이번에 조선 독립운동이라 칭하여 경성 기타에서 행한 운동이라는 것은 사리(事理)를 불변(不辨)하고 국정(國情)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 '내선동화'의 실(實)을 상해하는 것이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 ‘후작’은 ‘3·1 독립운동’을 이렇게 깎아 내리는 글을 썼다. 1919년 3월 8일자 ‘매일신보’에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치 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것이다.이완용은 3·1 운동을 “해외에 있으면서 조선의 현재 상태를 알지 못하는 무리가 조선의 독립을 기도, 민심을 선
[논객칼럼=김부복]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는 불후의 작품 ‘임꺽정’을 왜 쓰게 되었을까.홍명희는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었다.“그 때는 생활이 좀 궁했어. 그런 상황에서 한 달에 생활비 조로 얼마씩을 주겠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그냥 줄 수는 없다면서 생활비를 주는 대신,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 거야. 그래서 임꺽정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지.”불후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동기는 이랬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먹고살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생활비가 아쉬워서 쓰기 시작한
[오피니언타임스] 방랑시인 김삿갓이 주막집 주모를 유혹했다. 그 방법이 김삿갓다웠다. ‘7×8 자(字)’나 되는 시 한 수를 좔좔 써 내려간 것이다. 달필이었고 일필휘지였다. 그 가운데 뒷부분 ‘7×4’는 다음과 같았다.“소군옥골호지토(昭君玉骨胡地土)/ 귀희화용마외진(貴姬花容馬嵬塵)/ 세간물리개여차(世間物理皆如此)/ 막석금소해여신(莫惜今宵解汝身)”김삿갓이 시에 적은 ‘소군’은 이른바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한나라 때 궁녀 왕소군(王昭君)이다. ‘귀희’는 천하절색 양귀비(楊貴妃)다. ‘마외’는 양귀비가 죽은
[논객칼럼] 우리는 5만 원짜리 돈을 지갑에서 꺼낼 때마다 ‘신사임당’을 만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신사임당의 ‘이름’을 모른다.‘사임당’은 당호(堂號)일 뿐이다. 당호는 성명 대신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 인명을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가 신사임당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여성에게는 대체로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이름은 주로 ‘서울댁’이나 ‘김서방네’ 등으로 통했다. 100년도 더 전인 1911년, ‘매일신보’는 여성에게도 이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여자(女子) 명명
[오피니언타임스] 조선 말, 아손 그렙스트라는 스웨덴 출신 기자가 우리나라를 취재했다. 부산항에서 느낀 첫 인상은 조선 사람들의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는 돌아가서 ‘코레아, 코레아’라는 책을 집필했다.“코레아 사람들은 일본 사람보다 머리통이 하나 정도 더 있었다.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러웠고 여유가 있었다. 얼굴을 똑바로 하여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다.…”조선 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영국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도 비슷한 얘기를 썼다.“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