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김희태]예전에 후삼국 시대와 고려 통일의 과정을 다룬 사극 『태조 왕건』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때 등장했던 여러 인물 중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견훤(甄萱)이다.후백제를 건국하고, 왕이 되었던 견훤의 일생을 요약하면~-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견훤 자신이 세운 나라의 문을 스스로 닫아야 했던 비극적인 운명을 겪어야 했다.이러한 견훤의 일생 자체가 후삼국의 역사로 남았으며, 『태조 왕건』 이후 견훤에 대한 인지도 역시 높아진 편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후백
[논객칼럼=김희태]문화재가 들려주는 사비 백제의 흔적을 찾아보자!사비(泗沘),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자 소부리(所夫里, 현 충청남도 부여)로 불린 곳이다. 사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건 동성왕 때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사비 일대가 사냥터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버려진 땅이었던 사비를 주목했던 인물은 성왕이었다.성왕의 선택은 왜 사비였을까? 성왕이 언제부터 사비를 주목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백제가 다시금 강해지기는 위해서는 기존의 도읍인 웅진(熊津)을 벗어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논객칼럼=김희태]영조 때부터 시작된 태실 조성의 변화, 그 중심에 있었던 창덕궁 후원서울에 있는 궁궐 가운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있다면 단연 창덕궁(昌德宮)을 들 수 있다.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덕궁은 궁궐 자체 보다 후원(後苑)으로 대표되는 정원 유적이 핵심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후원은 도심 속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다. 그랬기에 조선 시대에도 역대 왕들이 후원을 찾았고, 현재 후원 곳곳에 남아 있는 건축물 등을 통해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후원의
[논객칼럼=김희태]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자!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는 삼국시대의 명장이자 삼한일통(三韓一統, 혹은 일통삼한)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탄생지 및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김유신을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경주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 김유신의 옛 집터인 재매정(財買井)과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등 김유신과 관련한 흔적들을 경주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뜬금없이 충북 진천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고 이야기 했을 때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일면 이해가 간다.앞서도 언
[논객칼럼=김희태]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흔적을 찾아보자!조선의 왕 중에서 단종(재위 1452~1455)은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단종과 관련한 내용은 지금도 사극이나 영화 등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 중 하나다. 이러한 단종의 흔적을 간직한 강원도 영월의 주요 관광지 중 영월 장릉(莊陵)과 청령포(淸泠浦)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단종과 영월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로, 이는 『일성록』에 기록된 영월부사 이경오가 상소한 내용 중 영월부에 대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본부는 본래 읍치 내의 민가가 겨우 10
[논객칼럼=김희태]태봉산에 방치되고 있는 숙종의 장태 석물, 수습과 보존에 힘써야충남 공주시의 지명 가운데 눈에 띄는 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태봉동(胎封洞)이다. 태봉동은 태봉산(胎封山)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태봉초등학교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서 태봉(胎封)과 관련한 지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이처럼 지명의 유래가 된 태봉산의 정상에는 공주 숙종대왕 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1호)가 남아 있어, 이곳이 숙종의 태실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숙종(재위 1674~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적장자로, 모처럼
[논객칼럼=김희태]태실(胎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장소는 단연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주에 세종대왕자 태실 이외에도 태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현재까지 성주에서 확인되는 태실은 크게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성주 태종 태실지 ▶성주 단종 태실지 등이 있다.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된 세종대왕자 태실과 달리 태종 태실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서삼릉으로 이봉된 뒤 태실지에는 민묘가 들어섰으며, 단종의 태실지는 세조가 즉위한 이후 당대에
[논객칼럼=김희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화재 가운데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한자 그대로, 탯줄을 의미하는 태(胎)와 집을 의미하는 실(室)인데, 쉽게 태를 봉안한 장소를 뜻한다.이러한 태실과 관련한 풍습의 최초 기록은 김유신 전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만노군(신라 때 진주(鎭州), 현 충북 진천) 태령산 정상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기록을 통해서 왕들의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고려 때 태장경(胎藏經)이 과거시험의 과목이었다는 점은 태실 관련 풍습이 조선시대에만
[논객칼럼=김희태]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대개 산의 초입이나 등산로에서 봉표나 금표 등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막연히 봉표(封標)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봉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우선 봉표는 왕릉의 조성 후보지에 표석을 세워 묘를 쓰는 것을 금했던 기능을 했다. 이는 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당 기록을 보면 현륭원(顯隆園, 현 융릉) 천봉이 이루어지기 전 화산 일대에 봉표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89년 7월 15일 봉표처 내에 이관진과 그의 부인 무덤이 있어 묘를
[논객칼럼=김희태]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하면 왕과 왕비, 대비의 무덤을 이야기하는데, 보통의 경우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신라의 경우 경주, 고려는 개성, 조선의 경우 서울과 경기도 등에 왕릉을 집중적으로 조성했다.그런데 강릉에도 왕릉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강릉에 무슨 왕릉이 있냐는 금시초문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실제 강릉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 강원도 기념물 제12호)이 남아 있다.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명주군왕릉의 단어를 끊어서 읽어보면 의외로 해당 왕릉의 정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
[논객칼럼=김희태]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누구를 중심에 두고 보는지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가령 조선의 역사를 다룰 때 주로 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반대로 왕비 혹은 여인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면 같은 사건과 인물을 다루더라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궁궐 내부에서 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꽃들의 전쟁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사건이자, 해당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조의 경우 여인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았던 왕 가운데 한 명이기에 정조 시대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논객칼럼=김희태]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춘천의 태실에 이어 오늘은 원주에 소재한 태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현재까지 확인된 원주의 태실은 크게 ▲ 산현리 태실 ▲ 대덕리 태실 ▲ 태장동 왕녀복란 태실 ▲ 운산 태실이다. 이 가운데 태장동 왕녀복란 태실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6호)를 제외한 다른 3곳의 태실은 비지정 문화재로, 마치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어 있어 태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소개할 원주 산현리 태실의 경우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산 2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해당 번지로 검색할 경우 너무 광범위한 지
[논객칼럼=김희태] 춘천 덕두원 태실의 태주는 1589년 이전 선조의 자녀 가운데 한 명이며, 춘천 용산리 태실은 화협옹주의 태실이다.태실은 전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로, 특히 태실이 있는 곳 주변에는 태봉산(胎封山)이나 태봉리(胎峯里) 등 지명 흔적을 함께 남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태실의 흔적은 강원도 춘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춘천의 태실은 크게 ▲ 춘천 용산리 태실 ▲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 춘천 덕두원 태실 등이 있다. 현재까지 세 곳 모두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
[논객칼럼=김희태] 이제까지 부여를 답사할 때면 백제와 관련한 유적지 답사가 주를 이루었다. 이는 부여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백제의 수도인 사비가 연상될 만큼 백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충남 금산에 이어 부여를 단시간 방문을 했는데, 이유는 부여에 있다는 선조대왕 태실비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간 인터넷과 논문 등의 자료를 통해 선조대왕 태실비가 부여군 충화면 오덕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선조대왕 태실비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해당 논문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태실비를
[논객칼럼=김희태] 태실과 관련해 앞서 소개한 예천 용문사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장소 중 명봉사(鳴鳳寺)가 있다. 정조 때 왕의 일기인 을 보면 정조 24년(=1800년) 3월 22일에 명봉사(鳴鳳寺)의 승려 봉관(奉寬)이 “명봉사는 태실(胎室)을 수호하는 사찰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앞서 용문사처럼 명봉사 역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내문을 보면 명봉사는 헌강왕 때인 875년 두운(杜雲)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나 여느 사찰이 그러하듯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다. 현
[오피니언타임스] 작년 예천에 있는 용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들르게 된 용문사는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와 함께 경내에 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어 볼만한 요소가 많았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꼽자면 자운루(慈雲樓)가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장으로 사용된 나름의 상징성과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장소로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145호)이 있다. 우선 대장전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웬 표석이 하나 있는데, 해당 표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고적비다. 즉 용문사 대장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역사와 관련한 탐방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문화재를 접하게 된다. 처음 문화재를 접할 때 주목해서 보는 건 문화재의 이름이다.우리가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듯 문화재도 불리는 명칭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는 편이다. 보통의 경우 문화재 앞에 지역명이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신라 왕릉의 경우 '경주(지역) + 무열왕릉(문화재)'하는 식이다. 또한 사찰의 경우 '경주(지역) + 불국사(문화재)'로 불리는데, 가령 불국사 내에 문화재가 있을 경우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고분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을 기준으로 피장자가 밝혀진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의 경우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지석을 통해 피장자가 명확하게 규명된 사례다. 또한 삼국의 항쟁과 나당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중국과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이전과 달리 고분에 비석을 세우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경주 무열왕릉과 문무왕릉, 김인문묘 등에 비석이 세워졌다. 따라서 왕릉 앞에 비석을 세운 경우 명문을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역사와 관련한 글을 쓰다보면 가장 휘발성이 높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글이 고대사 분야다. 특히 ‘사이비 역사학(=유사역사학)’을 추종하는 이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중 하나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른바 이다. 자칭 재야사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본래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학설의 이견이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그 순간 나는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탈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여러분들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어떤 것을 가장 중점에 두시는지?같은 내용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란 해석의 학문이기에 오늘 우리가 평가하는 현상이 먼 미래에는 다르게 인식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좀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를 통해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