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는 장사 없다지난 주 급성 장염으로 4일을 앓아누웠다. 한참 야식을 먹지 않다가, 그날따라 유독 어묵탕에 소주가 간절해 예정에도 없는 술판을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 새벽 4시쯤 설사를 하기 시작해 당일 오전 10시까지 설사와 구토를 합해 10차례 넘게 속을 게워냈다. 나중엔 어느 쪽으로든 물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삼킨 것이라고는 물뿐이었으니까.다행히 그날이 토요일이라 오전 중에 내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20분 넘게,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동네에나 맛집은부산 광안리 인근 주민이 된 지도 벌써 햇수로 4년차다. 부산하면 아무래도 바다 아닌가. 과장 조금 보태면, 집 앞에 유명 관광지를 두고 살아온 셈이다. 익숙하면 소중한 걸 잊는다고 했던가. 매년 여름마다 그야말로 파도처럼 물밀 듯 관광객들이 흘러들면, 그제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래, 여기가 광안리였지.그러다 보니 밥집이며 술집이며 음식점들이 참 많다. SNS에서 화제가 된 수십, 수백의 핫플레이스부터 현지 주민들에게 평이 좋은 숨은 맛집까지. 나는 입이 짧은 탓에 다양한 맛집을 섭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꽤
겨우 이런 미래형 식사애니메이션 ‘드래곤볼’에는 선두(仙豆)라는 것이 등장한다. 아직 손오공이 원숭이 꼬리를 단 꼬마였을 때, 높은 탑에 사는 고양이 신선 카린에게서 처음 받아먹은 콩이다. 이 선두는 한 알만 먹어도 기력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아무리 심각한 상처라도 순식간에 낫게 만드는, 그야말로 신선의 콩이자 묘약이다. 전투가 잦은 애니메이션에 반드시 필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드래곤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봤을 법하다. ‘언젠가 먼 미래에는 정말로 저런 선두가 개발되겠지? 한 알만으로 식사도 되고 치료도 되는
어쩔 수 없이 함께 먹었다.솔직히 말해,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함께 먹는 식사보다는 혼밥이 편하다. 우선 메뉴를 마음대로 정할 자유가 있다. 백주대낮에 돼지갈비를 구울 수도, 감자탕 가게 문을 반쯤 열었다가도 대뜸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도 상관없다. 하지만 함께 먹는 일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무리 중에 암묵적인 메뉴 결정권자가 있는 경우, 특히 그 결정권자가 불필요한 관대함을 발휘해 “자네들 먹고 싶은 걸로 먹지”라며 메뉴를 고르라고 하는 경우, 나 같은 인간은 꽤 큰 피로감을 느낀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인생
죽의 역사나의 유년기 기억을 되짚어 보면, 죽은 말 그대로 ‘죽이 아니면 안 될 때’ 먹는 음식이었다. 지독한 감기 몸살에 입맛이 사라졌을 때, 과식으로 심하게 급체했을 때,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 바로 죽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 내게 죽이란 대부분 희멀건 미음 같은 외관에 겨우 간장과 참기름 몇 방울뿐인 단출한 모양새였다. 또 죽은 어쩜 그렇게 매번 뜨거웠는지.그렇게 초라한 환자식 정도로만 여기던 죽의 역사는 사실 꽤 유구하다. 현재 인류가 주식으로 먹는 밥이나 빵은 고압고온으로 찌는 방식이기 때문
밀면의 가슴 아픈 역사부산 사람이라면 어느 동네, 어느 골목에서든 볼 수 있는 ‘밀면’이라는 두 글자. 시원하고 칼칼한 그 음식 덕분에 좋았던 기억들이 많다. 학창시절엔 땡볕에 한바탕 축구를 하고 나면 꼭 밀면을 먹었다. 물밀면을 시켜도 국물보다 면이 더 많았던 사장님의 인심도 기억난다. 냉면보다 가격은 저렴한데, 주린 배는 더 든든히 채워주던 밀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과 함께 먹을 땐, 큼직한 손만두를 슬쩍 밀어주기도 했던 시원하고 칼칼한, 밀면.밀면은 익히 알려진 대로 냉면에서 파생된 음식이다. 실제 우리 동네의 한
[오피니언타임스=김경빈] 서구라고 부르는 이들에게서 개화기를 맞이한 아시아 국가들은 보통 ‘서구 사회의 산물에 대한 막연한 사대주의’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개화기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기술적으로 발전된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련돼 보이는 것, 수요에 비해 공급이 현저히 적어 귀한 것, 빈국에게 쏟아지는 선진강대국의 것’ 등등이 서구 문물이었으니 그런 사대주의의 시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지금에 와서도 그 사대주의를 당연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다. ‘한국이 최고야!’ 하는 속칭 ‘국뽕’을 들이키자는 것은
자취생의 자격, 요리스물 이후, 군 복무 기간과 본가에서 집밥을 먹으며 지냈던 휴학 기간을 제외하면 약 6년 동안 ‘자취생’ 신분으로 살아왔다. 겨우 1평이 될까 말까 한 고시원의 공동 부엌에서부터 그보다 형편이 나아진 원룸의 부엌에 이르면서, 겨우 라면이나 계란 프라이 수준에 머물렀던 나의 요리도 조금씩은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지난 6년 동안 나는, 꽤 그럴듯한 한 끼로는 볶음밥만큼 수월한 메뉴가 없다는 것, 웬만한 찌개나 국 요리의 기초 단계가 비슷하다는 것, 라면보다 조금만 더 신경 쓰면 그럴듯한 파스타도 뚝딱 만들 수 있다
갈치, 칼치우스운 얘기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갈치’가 아니라 ‘칼치’가 표준어인 줄 알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해산물을 싣고 골목을 누비던 봉고나 포터에서 들려오던 확성기 소리, 동네 백반집 메뉴판, 어딜 가도 ‘칼치찌개’, ‘칼치조림’이라고 했으니까.여차 저차 해서 ‘갈치’가 표준어라는 걸 알고 난 후에도, 사실 ‘칼치’가 더 입에 붙었다. 실제로 칼치는 한자로는 도어(刀漁), 영어로는 Cutlassfish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어느 쪽으로 보나 갈치가 아니라 칼치가 맞는 것 같은데, 떠도는 썰로는 신라시대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