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허영섭]곳곳에 휘몰아치던 집중호우가 그치고 태풍도 비켜가면서 매미소리가 우렁차다. 폭염 날씨에 행여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까 창문을 열어젖히면 바람보다는 매미들 우는 소리가 먼저다. 마치 자기들이 여름철의 임자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매미들도 폭우 속에서는 그리 실력을 과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섭리적으로 울부짖는 천성을 지녔다 해도 퍼붓는 빗줄기를 맞아가며 발성기를 열어놓고 목청을 높이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을 터다. 이제 장마철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자기들 세상을 맞았다는 기세다.그렇다. 매미소리 들리지 않는
[논객칼럼=허영섭]부산 토박이 기업인으로 교육·문화 진흥과 지역발전에 이바지해 온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1일 타계했다.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에 걸쳐 태양약품, 태양사, 태양산업, 태양화성 등으로 이어지는 자수성가의 성공 신화를 기록한 향토 사업가다. 비록 중앙무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전성기 시절에는 몇해 동안이나 부산에서 개인소득세 1위를 기록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업에 매달리며 기력을 쏟아붓고도 97세를 일기로 마지막 눈을 감았으니, 이 험난한 세상에서 천수를 누린 셈이다.내가 이렇듯
[논객칼럼=허영섭]까치글방의 박종만 창립자가 최근 타계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그와 마주쳤던 내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떠올린다.고인으로서도 출판사를 차리기 전이었으니, 40년도 훨씬 전의 기억이다. 그렇다고 접촉이 잦았던 것도 아니다. 기껏 두어 번이나 만났을까. 당시 그가 근무하던 뿌리깊은나무 잡지 원고 때문에 마주앉았다는 업무적인 성격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만남이었다. 스쳐간 인연은 짧았으되 수더분하면서도 고지식한 첫 인상의 여운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수도 별로 없는 편이었던 것
[논객칼럼=허영섭]장미정원에는 이미 여름이 한창이다. 덩굴장미로 덮여 터널을 이룬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펼쳐지는 또 다른 요정의 세계다.보행로를 따라 나란히 피어 있는 온갖 종류의 장미들이 저마다 매혹적인 자태와 향기로 산책객들을 유혹한다. 같은 빨간색이면서도 품종에 따라 옅고 짙은 차이가 있는가 하면, 주황색이나 보라색까지 슬며시 곁들여져 자기만의 정취를 뽐낸다. 노란색에 파란색 장미도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 계절이 선사하는 장미꽃밭의 향연이다. 어디 그뿐이랴. 공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야트막한
[논객칼럼=허영섭]“짙은 어둠이 광장과 거리를 뒤덮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는 코로나 사태로 세계가 처해 있는 절망적인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열흘여 전의 봄비 내리던 저녁, 교황이 바티칸 광장에 홀로 서서 드린 기도였다. 평소 같으면 각국에서 몰려든 가톨릭 신자와 방문객들로 붐볐으련만 교황청 구역도 진작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텅 빈 광장의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갈 길이 막혀 버린 지구촌의 현실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인류의 구원을 바라며 성베드로성당 계단 앞에서 진행된 특별미사 장면이다.교황의 기도처럼
[논객칼럼=허영섭]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스쳐가기는 해도 낮에는 봄볕이 완연해지고 있다. 이미 입춘, 우수가 지난 절기의 순리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겨울은 워낙 따뜻하게 지나갔다. 한강도 모처럼 겨우내 얼지 않은 채 계절의 끝자락을 보내는 중이다. 두어 차례의 기습 한파로 모래펄에 물이 고여 있는 가장자리만 잠시 얼어붙었을 정도라고 한다. 도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 기슭에도 봄기운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던 희망의 봄날은 아니다. 아파트 화단의 볕바른 모퉁이를 따라 봄풀이 돋아나고 가로수
[논객칼럼=허영섭] 미래학 분야에서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앨빈 토플러가 한때 알루미늄 공장 용접공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것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두 살 나이에 공업도시인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로 옮겨가 얻은 생애 첫 직업이다. 결혼을 한 것도 이때였다. 물론 그의 의도가 용접공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작업장의 경험을 소설로 써 보겠다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틈 날 때마다 글을 썼으나 문학적 능력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네 해 만에 용접공 일을 접고
[오피니언타임스=허영섭] 우리 인생길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자동차 행렬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온갖 차량이 일정한 간격의 차선을 따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모습은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비교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고속도로가 아니라 일반 국도나 한적한 시골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일단 도로에 올라서면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자동차나 인생에 있어서나 하나의 숙명이다. 운전대를 잡고도 눈길을 돌려 바깥 경치를 즐길 수 있느냐 하는 약간의 여유 차이가 있을 뿐이다.돌이켜보면 이번 한 해도 먼
어느덧 연말, 송년 모임의 계절이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떼어낼 때가 되었으니 얼굴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세월이 수상쩍게 돌아가도 연말 모임에 대한 미련들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쓴 소주 한 잔씩이라도 나누며 한바탕 떠들어대지 않고서는 한 해를 보내지 못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객기가 남아 있는 탓일 것이다.그러고 보면 꼭 친구들만의 얘기도 아니다. 인연을 맺었던 모임에서마다 호출장이 날아들고 있다. 꼭 전화가 아니라도 카톡이나 문자, 이메일 등으로 약속이
[논객칼럼=허영섭] 바둑판은 가로, 세로 열아홉줄씩으로 그려져 있다. 그 361개의 교차점 위에서 흑백 착점의 수순에 따라 대국이 이뤄지는 것이 바둑이다. 특히 가로, 세로 열아홉줄이라는 규칙은 다른 스포츠 종목의 규칙과 비교해서도 매우 엄격한 편이다. 축구의 경우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지만 동네 축구에 있어서는 경기장 규격이나 선수 구성이 서로의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길거리 농구’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바둑판에서만큼은 프로선수들이 겨루는 한국기원 바둑판이나 노인정 바둑판이나 모두 열아홉줄이다.만약에 바둑판이 지금의 열
[논객칼럼=허영섭] 공휴일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동네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서는 것이 주요 일과로 자리 잡은 게 오래 전부터다. 바깥 약속을 잡더라도 가급적 산책 시간만큼은 비워두곤 한다. 이제는 하나의 생활 습관으로 굳어졌다고나 할까. 서울 변두리의 여러 신도시 중에서도 유독 아파트값이 정체된 지역에 20년 이상 눌러 살고 있는 처지가 불만이긴 하지만, 공원 산책에서 얻는 마음의 위안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 보상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건강을 챙기는 방법으로도 그만이다.계절이 바뀌면서 운치를 더해가는 공원 경치는 가히 일품이다. 야
[논객칼럼=허영섭] 언론계 대선배인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이 8일 별세했다. 중일전쟁 무렵인 1937년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 향년 82세다.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뒤에도 신문공정경쟁위원장, 뉴스통신진흥회 이사를 지내며 언론계 활동에 기여했다. 이후 (사)국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으며 타계하기까지도 상임고문을 맡아 왔다. 한마디로, 평생을 부지런히 지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면서도 늘 웃음의 여유를 보여주셨던 주인공이다. 근년에 직접 뵐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고인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기만 하다.그러나
[논객칼럼=허영섭] 핸드폰으로 주고받는 대화방마다 ‘알수없음’님의 행렬이 이어진다. 일단 모임이 결성되어 연락처가 작성되면 으레 단톡방이 뜨기 마련이지만 도중에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내거는 이름이 바로 ‘알수없음’이다. 동창회나 사우회, 향우회 등 친목 모임에서의 사정이 모두 비슷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노출시켰다간 ‘이탈자’라고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은근히 켕기는 탓일 것이다. 모처럼 동료들끼리의 식사모임에 참석했다가 불가피하게 일찍 자리를 뜨면서 뒤통수에 쏠리는 눈총을 의식해 본 경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대화방을 빠
[논객칼럼=허영섭]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70년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한 공직 기록을 남긴 인물을 꼽자면 단연 이회창 전 국무총리일 것이다. 대법관과 중앙선관위원장을 지냈으며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집권당이던 신한국당 대표 자리까지 올랐던 주인공이다. 사법·행정·입법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자리인 대통령 도전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세 차례나 연달아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니, 정치적 회한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요즘 그 회한을 기록한 ‘이회창 회고록’을 읽고 있다. 그의
[논객칼럼=허영섭] 어머니를 여읜 지 벌써 네 해가 지나가지만 생전에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대로다. 돌아가셨을 때의 망연했던 심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는 해도 당신의 흔적으로 남기신 유품을 들여다볼 때마다 회한의 심정이 불현듯 되살아나곤 한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서 돌아가셨지만, 그 전까지 머무르시던 문간방에는 당신께서 생전에 매만지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직도 서랍 속에 보관돼 있다.유품이라고 해야 성경책이나 탁상용 거울을 포함해 평소 옆에 놓고 사용하시던 자잘한 일상용품들 정도다. 머리빗과 돋보기안경, 손톱깎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