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이루나]얼마 전 컴퓨터를 교체했다. 전에 쓰던 노트북이 5년이 넘어가니 마음대로 꺼지며 말썽을 부린다. 노트북의 작은 화면에 지쳐 있던 터라 화면이 큼직한 올인원 형태의 PC로 교체했다. 부팅 속도도 매우 빨라졌고, 저장 공간도 몇 배는 늘어났다. 모든 게 맘에 들지만 아쉬운 게 하나 있다. CD 플레이어가 없다. 설계 기획 단계에서 이미 CD는 고려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음반 CD들을 바라본다. 최근 꺼내 들어본 적이 없어 먼지만 가득 쌓여있다.기억을 더듬어보면 학창 시
[청년칼럼=이루나]봄이다. 집 앞 중랑천 뚝방길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하늘거리는 벚꽃 잎들의 자태가 아찔하고, 벚꽃 내음도 바람을 타고 너풀너풀 넘어온다. 23층 베란다에서도 단내가 나는 듯하다. 하지만 벚꽃 구경 가는 것이 주저된다. 아버지를 차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서러움처럼, 봄을 오롯이 봄이라고 느낄 수가 없다. 코로나가 앗아간 우리네 봄의 모습이다.6살 딸은 2개월 넘게 집에 갇혀 있다. 한두 개씩 사 모은 보드게임도 질려서 책장 구석에 쌓여 있다. 밖에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 대지만 먼저 나가자고 조르지
[청년칼럼=이루나]"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여러모로 까칠한 설날이 지나갔다. 연휴도 4일밖에 되지 않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 많은 곳 나서기가 꺼려질 즈음이다. 허나 밥벌이를 하는 곳은 서울이고, 나고 자란 곳은 부산인지라, 명절 때면 이동이 일상이다. 다행히 대기 번호 4000번대로 겨우 KTX 열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클릭 한 번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을 손쉽게 일렬로 줄 세울 수 있는 세상이다. 기술 덕분에 기회는 공평해졌다지만,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연휴 첫날 서울역에
[오피니언타임스=이루나]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 A와 B가 있다.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그저 같은 학과에 같은 동아리에 참여하게 된 우연이 겹친 인연이다. 사범대라는 특성상 남자 수도 적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뚜렷하지 않았다. 교사라는 장밋빛 꿈은 임용고시라는 벽 앞에 완고했고, 다른 직업을 찾기 위해 쌓아야 할 스펙은 가보지 않은 험난한 길이었다. 그저 물 위에 뜬 튜브처럼 부유하며, 4년의 커리큘럼을 차곡차곡 지워나가고 있었다.A는 인기가 많고 매력이 넘쳤다. 고등학교부터 힙합에 빠져 랩도 잘하고 주변 동료들과의 친화력도 좋
[오피니언타임스=이루나] 어린이집 행사에 다녀왔다. 아빠들만 참여하는 특이한 프로그램이었다. 평일 저녁 5시라는 애매한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4~7세 자녀들의 아빠들이 30명 넘게 모였다. 어렵게 연차를 쓰거나,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달려왔을 터이다. 드레스 코드는 흰색 티와 청바지이다. 예비군도 끝난 30~40대 남자들이 같은 옷을 입고 모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빠끼리도 아직 낯설고 데면데면하다.이윽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아빠와 자녀 간의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놀이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아빠들은 슈퍼맨 복장을 하고 아이들의
[청년칼럼=이루나] 한글날, 용산에 위치한 한글 박물관에 들렀다가 핸드폰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행사에 밀려드는 인파 속 틈바구니를 헤쳐나가다 애먼 사람과 부딪쳐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부딪친 사람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3년 반을 넘게 사용한 핸드폰이기에 이번 기회에 바꾸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졌다. 공시지원금, 선택약정, 할부원금, 결합할인 등 다양한 용어가 넘쳐났다. 하지만 이면에는 더 은밀한 암호가 숨어있다. ‘성지’라고 불리는 불법 보조금을 지급하는 업체의 장소와 할인 조건 등이 한글 초
[청년칼럼=이루나]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바뀐다.내가 학교에 다닐 때 가장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신문이었다. NIE(Newspaper In Education), 신문을 통한 교육이란 용어가 흥할 정도로, 강력한 권위를 가진 매체였다. 지역 신문에 이름이 한번 실리면 가문의 영광이었고, 고이 잘라 스크랩하여 보관하곤 했다. 신문에서 하는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고, 귀담아들을 내용이라 생각했다. 매체로서도 중요했지만, 신문 종이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쓰였다. 운동회에서는 돗자리 대용으로 쓰이고, 주방에서는 기름 튀는 걸
[청년칼럼=이루나] 테헤란로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손에는 전투 무기가 하나씩 들려있다. 커피다. 치열한 전쟁터에 살아남기 위한 직장인들만의 안쓰러운 생존법이다. 커피숍이 많다는 테헤란로이지만 유난히도 녹색 간판의 스타벅스가 많이 몰려있고 손님들도 많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점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자전거 바큇살처럼 지점을 퍼져나가게 하는 허브 앤 스포크(Hub & Spoke) 전략이라고 한다. 어쩐지 우리 동네 근처에는 스타벅스가 없더라니.내게 스타벅스는 남의 얘기였다. 대학생 시절 힘들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모아 떠난
[청년칼럼=이루나] 친척 결혼식 참석을 위해 고향인 부산에 가게 되었다. 장거리를 운전해서 가는데 결혼식만 보고 오기가 아쉬웠다. 부모님과 함께 외도에 다녀오는 1박 2일 일정을 급하게 짰다. 외도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딴 섬이다. 왕복 뱃삯에, 입장료도 따로 있고, 게다가 관람 제한 시간마저 있다. 아주 콧대 높은 갑님이다. 음식물 반입도 되지 않는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귀한 분을 영접하러 가는 분위기다. 어떤 녀석인지 꼭 한번 보고 싶은 오기가 생긴다.부산에서 거제도로 가는 길은 거가대교로 매우 편리해졌다.
[청년칼럼=이루나]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하고 건대 입구로 향했다. 다음날 공휴일이라 인근 술집은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기름진 삼겹살 냄새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을 건너뛰고 발길을 재촉한 덕분에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한적한 캠퍼스 분위기와 달리 지하 공간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어수선했다. 출발 시각이 임박한 공항의 여행객들처럼 한 옥타브 올라간 재잘거림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서둘러 티켓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큰 박수와 함께 반 백발의 강연자가 등장했다. 유홍준 선생님과의
[청년칼럼=이명렬]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새로운 공간 개념과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공간을 이분법으로 명확히 나눌 수 있게 된다. 젊은이들이 넘치는 술집이나, 아이가 먹기 힘든 매운 음식을 파는 음식점은 방문을 꺼리게 된다. 주차가 되지 않거나 한참을 줄을 서고 기다려야 하는 맛집도 방문하기 어렵다. 결국 아이와 함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굳이 찾아 나서게 된다.이런 부모의 욕구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곳이 바로 키즈카페다. 트램펄린, 블록 장난감, 카트, 볼풀 등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다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한 달 전 지인으로부터 넷플릭스의 무료 ID를 건네받았다. ‘블랙 미러’라는 SF 시리즈 드라마도 함께 추천받았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무료하게 인터넷 검색을 하다 넷플릭스 앱을 클릭했다. 인기 콘텐츠, 지금 뜨는 콘텐츠, 내가 찜한 콘텐츠 등이 리스트에 뜬다. 영상과 이미지 중심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편리했고 자막 처리도 시원시원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화질 저하나 끊김 현상도 없었다.앱의 운영보다 돋보이는 것은 콘텐츠의 질이었다. 블랙 미러 시리즈는 미래의 진보된 기술과 인류와의 접점에서 생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15년 전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나서 명절에는 어떻게든 부산행 열차표를 구했다. 인터넷 예매가 실패한 날이면 4호선 첫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현장 잔여석을 구매한 적도 있다. 비록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처량한 뒷모습이나마 아침 뉴스 참고화면으로 실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런 열차 신봉자가 올해는 호기롭게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겠노라 선언했다.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하고 대기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차로 운전해도 열차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이 섰다. 편도 380km의 거리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어린이집에서 친해진 딸아이 또래의 가족들과 함께 대부도의 펜션을 빌려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라 또래 아이의 아버지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4살 즈음인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는 루돌프를 타고 선물을 가져오는 멋진 할아버지다. 산타클로스가 딸에게 물었다. 올 한해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 어떤 선물을 갖고 싶니? 딸은 ‘마리모’라고 대답했고 산타는 난감해했다. 산타는 미리 준비한 장난감을 서둘러 전달하고 2층 계단으로 황급히 떠났다.아이 입에서 ‘마리모’가 나올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올해 초부터 동네에 우후죽순 코인 노래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젊은 고객이 자주 찾는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오래된 노래방들도 덩달아 리모델링을 하더니 말끔한 외관을 갖추기 시작했다.코인 노래방의 요금은 4곡에 1000원이다. 한 곡에 250원 꼴이다. 버스 요금보다 싸니 크게 부담이 없다. 올 여름 부산에서 들른 코인 노래방도 비슷한 가격이었다. 암묵적인 전국 공통 소비자 가격인 모양이다. 코인 노래방에 들르기 전에 꼭 주머니를 뒤져 현금을 찾아놓아야 한다. 웬만한 소비는 신용카드와 간편결제로 해결 가능한 시대에 보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난 걱정이 많다. 사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눈앞의 일이 급한데도, 그 너머의 일을 고민하곤 한다. 걱정들의 다수는 실현되지 않는다.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변가의 파도가 그치지 않는 것처럼 내면의 걱정도 끊임없이 밀려든다. 차곡차곡 모래가 쌓이는 것처럼 걱정도 쌓인다. 지독한 악순환이다. 최근 이직을 하게 되면서 걱정이 더욱 늘었다. 낯빛이 어두워지고 쉽사리 움츠러든다. 바둑을 둘 때 프로는 100수 앞을 내다 본다고 한다. 난 다음 수는커녕 자충수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청년들이 모여있는 글쓰기 토론방의 단체 채팅 창은 가끔 재미난 글들이 오간다. 방장이 먼저 말문을 연다. 방금 풍성한 사냥을 끝낸 사자 어미 같이 청년들이 좋아할 따끈한 글들을 여럿 풀어 놓는다. 이젠 필진들이 열심히 물어뜯을 차례이건만, 도리어 채팅창은 진지해진다. 진부한 문체, 소재 고갈, 마감 압박 등 잔뜩 묵혀둔 고해성사가 한바탕 벌어진다. 날카로운 시선과 자기만의 감성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필진들이건만 앞다투어 자기비판을 하는 모습이 사뭇 낯설다.나도 반성에 앞장서는 편이다. 출퇴근길에 다른 사람들의 글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도시에 축제가 열렸다. 매년 장안동에서 열리는 세계 거리 춤 축제다. 1km가 넘는 자동차 도로를 막고, 춤을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를 한다.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6차선 도로 위를 자유롭게 걷는 것은 색다른 재미다. 가족과 함께 저녁도 먹고 구경도 할 겸 축제 길로 향했다.흥겨운 음악과 먹거리가 넘쳤다. 젊은이들은 긴 줄을 기다려 받은 푸드 트럭의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며 맛의 깊이를 태그 하느라 바쁘고, 노인들은 포장마차 파전과 막걸리 한 사발에 인생의 무게를 논하는데 바쁘다. 글로벌 축제답게 인도 탄두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가고시마. 왠지 가고 싶게 만드는 일본 규슈 섬 남부의 도시다.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방인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잿빛 화산재다. 검은 모래가 도시 곳곳을 휘덮고 있다. 화산재의 주인은 가고시마 항구 건너편의 사쿠라지마 화산섬이다. 제주도 같은 휴화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활화산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용암이 이글거리는 거친 화산은 아니지만, 빈번히 분화하며 화산재를 바다 건너 도심으로 배달하는 성실한 화산이다. 내가 도착한 날에도 화산은 연신 잔기침을 하고 있었지만, 현지인들은 시큰둥하며 제 갈 길을 갔다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2007년 12월 23일 오후, 전날 비가 내린 후 화창해진 오사카 난바 거리를 걸었다.일어에 능통한 대학 친구와 함께 배낭 메고 떠난 첫 일본 여행이었다. 점심으로 회전초밥 식당에서 가득 배를 채운 터라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을 걷기로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지도 어플 대신 공항에서 얻은 큼지막한 지도를 펼쳐 들었다. 백화점, 호텔 등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방향을 잡고 난바역 주변을 걸었다. 번화가 특유의 부산함은 낯선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가득하다. 으레 호객꾼들도 들러붙어 유창한 한국말로 가게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