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김부복]어떤 일본 사람이 만주 벌판의 혹한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일본보다 위도가 높은 만주 벌판은 무척 추웠을 것이다.“산천초목이 모두 얼어붙었다. 무엇이든 얼어버렸다. 날달걀은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마음대로 자를 수 있었다. 파는 마른 나무처럼 뚝뚝 부러졌다. 잉크도 양젖도 석유까지도 얼었다.… 밖으로 나오면 콧구멍이 얼었다. 눈을 감으면 위와 아래의 눈꺼풀이 달라붙었다. 길을 가는 사람은 수염이나 턱에 고드름을 늘어뜨렸다.…”그런데 ‘지구온난화’는 만주의 기온도 올려놓을 참이다. 몇 해 전
[논객칼럼=김부복]한나라 장군 한신(韓信)의 ‘배수지진(背水之陣)’은 유명하다.한신은 조나라와 싸울 때 부하 장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면서 강을 등진 채 배수진을 치도록 했다.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그리고 한바탕 전투 끝에 패한 척하며 후퇴했다. 배수진을 치고 대항하는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들이 적의 성을 점령, 한나라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훗날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배수진을 이렇게 평가했다.“한신이 배수지진을 쓴 것은 상대 장수인 진여(陳餘)가 백전노장이라 실패할 진세로 유혹하지
[논객칼럼=김부복]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경주에서 왕릉급 고분을 발굴하던 학자들이 ‘청동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만세’를 불렀다.항아리 밑바닥에 1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16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었다. 그 글자 가운데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이었다.당시의 고분 발굴은 일본이 패망해서 자기 나라로 쫓겨난 뒤, 순전히 우리 기술로 시도된 첫 발굴사업이었다. 그 첫 발굴에서 일본이 눈에 불을 켜며 뒤지고도 발견할 수 없었던 광개토대왕이
[논객칼럼=김부복]1124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외모’를 “체구가 크고 얼굴이 검고 눈동자가 불룩한 모습”이라고 적었다. 사신은 그러면서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많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학자로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알다시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책임자다.그러나 김부식은 자신의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 그 바람에 사신의 기록과 달리 존경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윤관(尹瓘)은 북방민족을 여러 차례 다스린 명장이었다. 여진족
[논객칼럼=김부복]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은 ‘삼한일통’의 주요 역할을 한 사람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 있다. 손바닥만 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거꾸러뜨린 것은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삼국사기에도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 누구보다 많다. 김유신은 ‘영웅’이었다.그렇지만 당한 입장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눈에는 영웅으로 보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의 피(血)와 뇌(腦)를 산과 들에 뿌리게 한 ‘간웅(奸雄)’이라고 부
[논객칼럼=김부복] 서기 668년은 ‘치욕의 해’였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의 군사들에게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그렇지만 고구려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임금은 항복했어도 백성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단군 이래 3000년이나 만주벌판을 차지했던 백성이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백성은 망할 수 없었다.특히 안시성의 저항은 대단했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쳐들어왔다가 눈알을 잃고 피눈물을 뿌리며 달아났던 곳이다. 이세민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논객칼럼=김부복]잘 알려진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를 돌이켜보자.한나라 임금 유방이 어느 날, 신하인 한신과 얘기를 하다가 불쑥 물었다.“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한신이 말했다.“임금께서는 10만쯤 거느릴 수 있는 장수입니다”유방이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는가”한신이 대답했다.“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유방이 또 물었다.“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10만밖에 거느릴 수 없는 내 밑에 있는가”한신이 또 대답했다.“임금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논객칼럼=김부복] ‘어진 임금’ 정조는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를 각별하게 아꼈다. 임금이 직접 박제가의 집을 방문할 정도였다. 정조는 박제가의 집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 ‘어애송(御愛松)’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임금이 사랑하는 소나무라는 뜻이다.박제가는 젊었을 때 저술한 ‘북학의(北學儀)’를 요약, 정조에게 건의했다. 청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했던 박제가는 경제부터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를 비롯한 모든 나라와의 교역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시장개방’을 주장한 것이다.청나라에 있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논객칼럼=김부복]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는 불후의 작품 ‘임꺽정’을 왜 쓰게 되었을까.홍명희는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었다.“그 때는 생활이 좀 궁했어. 그런 상황에서 한 달에 생활비 조로 얼마씩을 주겠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그냥 줄 수는 없다면서 생활비를 주는 대신,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 거야. 그래서 임꺽정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지.”불후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동기는 이랬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먹고살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생활비가 아쉬워서 쓰기 시작한
[오피니언타임스] 방랑시인 김삿갓이 주막집 주모를 유혹했다. 그 방법이 김삿갓다웠다. ‘7×8 자(字)’나 되는 시 한 수를 좔좔 써 내려간 것이다. 달필이었고 일필휘지였다. 그 가운데 뒷부분 ‘7×4’는 다음과 같았다.“소군옥골호지토(昭君玉骨胡地土)/ 귀희화용마외진(貴姬花容馬嵬塵)/ 세간물리개여차(世間物理皆如此)/ 막석금소해여신(莫惜今宵解汝身)”김삿갓이 시에 적은 ‘소군’은 이른바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한나라 때 궁녀 왕소군(王昭君)이다. ‘귀희’는 천하절색 양귀비(楊貴妃)다. ‘마외’는 양귀비가 죽은
[오피니언타임스] 조선 말, 아손 그렙스트라는 스웨덴 출신 기자가 우리나라를 취재했다. 부산항에서 느낀 첫 인상은 조선 사람들의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는 돌아가서 ‘코레아, 코레아’라는 책을 집필했다.“코레아 사람들은 일본 사람보다 머리통이 하나 정도 더 있었다.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러웠고 여유가 있었다. 얼굴을 똑바로 하여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다.…”조선 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영국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도 비슷한 얘기를 썼다.“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 어떻게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 유시’를 이렇게 발표했다. 선전포고였다. “나는 이제 필승을 거둘 수 있는 계책 5가지를 대략 말하겠다. ① 강대국으로서 약소국을 공격한다는 점이요 ② 명분이 옳은 군사로 역적을 토벌한다는 점이요 ③ 잘 다스려진 나라로 혼란한 나라를 공격한다는 점이요 ④ 편하게 휴식한 군사로 피로에 지쳐있는 적을 상대한다는 점이요 ⑤ 기뻐하는 백성으로 원망하고 있는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누구나 알다시피, ‘천자문(千字文)’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은 천자문을 배울 때 맨 먼저 ‘하늘 천, 따 지…’를 읊었다. 그러면서 ‘하늘의 도’인 천도(天道)를 익혔다.천도 다음에는 지도(地道)다. ‘땅의 도’다. 천자문의 지도에는 ‘금생여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나온다. 금은 여수에서, 옥은 곤륜산 언덕에서 생산된다는 뜻이다.중국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게 금, 가장 좋은 것을 옥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금 생산지인 여
[논객칼럼=김부복] 고구려에 ‘경관(京觀)’이라는 건축물이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건축물이었다. 경관은 수나라 113만 침략군을 무찌른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적군의 뼈와 유골을 쌓아올리고 만든 건축물이었다. 따라서 위대한 ‘승전 기념물’이었다. ‘탑’ 모양의 건축물이었다고 하니 ‘경관대탑’이었다.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30만5000명의 수나라 군사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2700명에 불과했다. 생존자가 2700명에 불과했다는 것은 단 한 판의 싸움에서 99% 이상의 군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세계 전사에서
[논객칼럼=김부복]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이 부하 장수 윤자기(尹子琦)에게 수양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윤자기는 13만 대군을 이끌고 수양성을 포위했다.성을 지키던 장순(張巡)은 고민에 빠졌다. 거느리고 있는 군사가 고작 7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장순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병서를 이것저것 뒤지며 궁리를 했다. 그러나 묘책은 없었다. 적이 한번 공격해올 때마다 군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군량마저 바닥날 지경이 되었다. 성은 함락 위기에 놓이고 있었다.장순은 간신히 병서의 한 구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1918년 4월, 독일군이 벨기에 남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아무리 다그쳐도 병사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한 장교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영국 방위군이 없었음에도 진군이 멈추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적군이 버리고 간 참호 속의 풍부한 비축식량을 보자 독일군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군인들은 더 이상 명령을 듣지 않았다. 수년 동안 굶주려온 이 병사들은 눈앞에 양식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맹렬하게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강행군’은 무리한 행군을 말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위험한 행군이다. ‘손자병법’은 강행군을 고집하면 싸움에 패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100리 길을 휴식도 없이 주야로 강행군해서 적과 기선을 다투면, 장수가 적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체력이 강한 병사만 앞서고, 약한 병사는 낙오해서 병력의 10%만 전장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50리 길을 강행군해서 적과 기선을 다투면, 선두부대에 있던 장수는 패하거나 좌절하게 된다. 병력의 50%만 전장에 도착하기 때문이다.”수나라 양제(煬帝)는 ‘손자병법’의 경고를 무시했
고구려 신대왕 8년(172), 후한이 ‘대병’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은 즉시 작전회의를 소집했다.여러 신하들이 주장했다.“적은 군사 숫자가 많다고 고구려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겁이 많다고 간주,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습니다. 한 사람의 병사가 요새를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가 많더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니 나아가서 싸워야 합니다.”그러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냉정했다.“그들은 군대가 많고 강하니, 지금 맞서면 우리가 불리할 수 있습니다.
[논객칼럼=김부복] ‘간도(間島)’는 만주의 드넓은 육지를 말하는데 왜 ‘섬 도(島)’자가 붙었을까.‘설’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 이북을 경작하면서 ‘간토(墾土)’라고 했는데 이것이 발음이 비슷한 ‘간도’로 변했다는 설이다. 두만강 한가운데 섬이 있는데 옛날부터 이를 ‘사잇섬’ 즉 ‘간도’라고 불렀다는 등의 얘기도 있다.아마도 우리 영역을 줄이고 깎으려는 사람들의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땅 간도는 남한 면적의 절반이나 되는 간단치 않은 넓이였다.조선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초인 1809년 극
[논객칼럼=김부복]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안보는 ‘철통’이었다. 모조리 체포되고 말았다.이세민은 고심 끝에 삼불제(三佛齊)라는 나라의 임금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 고구려의 정확한 군사 숫자, 군대 배치, 부대의 위치 등을 정탐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삼불제는 남해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우호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삼불제의 사신은 마음대로 고구려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거액 송금’에 넘어간 삼불제 임금은 사신을 빙자한 간첩을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