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허승화] 영화 '더 파더'에 등장하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는 젊음을 바쳐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는 삶의 끝에 이르러 치매에 걸린 탓에 눈앞에 놓인 상황과 머릿속 환상을 끊임없이 혼동한다. 그 와중에도 늘 자신의 살가운 둘째 딸과, 평생을 바친 ‘내 집’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한 평생을 바쳐 마련한 자기 집인데 딸이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며, 집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영화는 안소니가 있는 집의 모습과 가족들의 얼굴을 매번 바꾸어 담아내며, 관객들도 안소니
[청년칼럼=허승화]‘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잃어버렸던 자다’이 문장은 정약용 선생이 쓴 수필, 에 등장하는 구절로 정약용 본인이 스스로를 평가한 말이다.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글을 보고, 나는 위인으로만 알던 정약용이 이런 말을 쓴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전 교과과정을 통틀어 이 구절에 제일 꽂혔다. 속 ‘수오재(守吾齋)’라는 이름은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으로, 정약용의 큰 형님 정약현이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이다.큰 형님은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귀양살이 중이던 정약용은
[청년칼럼=허승화]인류의 첫 경험2020년대를 맞이한 인류에게 첫 재앙이 닥쳤다. 무엇에 대해 쓸까, 이번처럼 고민 안 해본 것은 처음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외에는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어떤 식으로든 바꿔놓았으니 당연한 일이다.인류에게는 늘 환상이 있었다. 재난도 영화 속 환상에 가까웠다. 영화관에서, 공항에서, 여행지에서, 환상은 사고 팔렸다. 전세계는 지구촌이며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의 믿음은 코로나-19가 가장 먼저 깨 준 환상이다. 세계가 서로를 향해 열었던 문들은 닫혔다.
[청년칼럼=허승화] 대부분의 인간은 늙지 않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늙는다는 것은 좋지 않은 느낌을 준다. 관절이 안 좋아지고, 머리숱이 적어지고 주름살이 늘고 전체적으로 쇠약해진다는 이미지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쭉 젊음을 무기로 발전해온 종족이었고, 늙는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니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싫을 수밖에.반면 젊음은 항상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생기있고 밝고 통통 튀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젊음을 칭하는 청춘이라는 명사에는 젊음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담겨있다. 사랑은 늘
[청년칼럼=허승화] 2020이라는 숫자를 보니 가슴이 벅차다. 만화 를 보던 세대는 아니지만 만화 주인공들이 우주를 누비던 시점이 2020년이란 건 알고 있다. 내게도 2020은 미래 그 자체였다. 그런데 2020년이 되고 말았다. 영원히 미래일 줄로만 알았던 시점이 현재로 도래한 것이다.새해가 시작되었으니 새해 계획을 부랴부랴 실행할 시기다. 지난해를 돌아보고 올해를 내다보았다.#2019년지난해 동안 나의 화두는 단언컨대 먹고사니즘에 관한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나를 벌어 먹여 살려 줄 일자리를 찾는 것, 적어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나는 현재 결혼을 주제로 극을 한 편 쓰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식과 천차만별인 결혼관들의 중간을 찾는 것이었다. 취재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결혼에 대해 물었지만 의견은 천차만별이었다.기본적으로 세대에 따라 결혼관이 많이 갈리기는 한다. 인터넷을 보면 비혼 주의자들이 대다수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고, 주말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은 자꾸만 날아온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며, 졸혼을 하고 비혼을 외친다. 유퉁 씨는 얼마 전 여덟 번째 결혼생활
[청년칼럼=허승화] 설리가, 고인이 되었다. 믿기 어렵지만 우려는 예상보다 더 끔찍한 현재가 되었다. 그녀의 우울증은 너무나 예상 가능했다. 악플이라는 원인과 한 젊은 여성의 죽음이라는 결과 앞에 나는 커다란 무력감을 느낀다.시선과 평가, 폭력개인적 친분이나 접점이 없는 인물임에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 이유는, 더 악질인 것이 분명한 사람은 멀쩡히 살고 착하고 여린 사람이 못 견디고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또 다시 재연되었기 때문이다.거의 모든 대중은 그녀의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너무 모질게 굴었다. 나는 그녀가
들어가며준비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결과가 될 수 없다. 준비는 과정이다. 과정은 괴롭다.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그렇다. 집에서 나가기 위해 씻고 준비하는 과정만 해도 늘 생략하고 싶은데, 더 커다란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즐거울 리는 없다.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는 뜻의 ‘미생’처럼, 모든 준비는 그렇게 무언가 ‘덜 된 것’이다. 준비생의 삶은 설익은 밥 마냥 푸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미생의 경우는 조금 낫다. 인턴이라도 하고 있으니까.꿈도 희망도나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만 무엇도 안 되는 수많은 사람을
[청년칼럼=허승화] 나는 1994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해라는 것과,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일깨운 계기가 된 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는 그런 시절을 증언하는 영화다. 보고 나니 그 시절을 견딘 사람의 생생한 보고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 시절 대치동에 사는 소녀 은희와 만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일상화된 폭력영화 는 1994년 대치동에 살았던 15살 소녀 은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
좋은 어른 좋은 어른을 만나기란 어렵다. 나도 어른이지만 주위에 제대로 된 어른 하나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 주위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제 몸 하나 건사하는데 급급하고 그것에 익숙해질 때쯤 결혼해 감당하기 벅찬 존재를 더해간다. 그러므로 좋은 어른이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몇 년 전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 선배님을 만났다. 내가 살아오며 보았던 60년대 생 중에서 가장 젊은 생각과 감각을 유지하며 살아가시는 분이다. 그는 만나자 마자 친구와 나를 횟집으로 데려가 고등어회를 주문했다. 회를 먹으며 우리가
정답과 오답 사이 얼마 전, 갑자기 아버지가 내게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정확히는 돈 대줄 테니 공무원 학원 다닐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던 차에 허무해지는 말을 들으니, 웃음이 먼저 새어 나왔다. 나는 내가 왜 공무원이 되어야 하냐고, 나는 시나리오와 영화를 전공했다고 반문했다. 아버지는 그래도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글 쓰면서 공무원 준비도 하라는 것이다.말은 쉽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해도 능력 부족에 시달리는 내게 ‘갑자기 분위기 공무원’이라니. 다들 목숨 걸고 공무원이 되려는 시대에 그게 말처럼
[청년칼럼=허승화]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겠지만, 무엇이 나를 위로하는지 알아야 조금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다. 과연 사람을 위로하는 건 무엇일까. 한마디 말? 한 그릇의 밥? 한 잔 술? 한 번의 여행? 아니면, 한 권의 책? 내게 위로는 십 대 시절, 나는 지금보다 오만했다. 당시의 나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에 대해서 알러지가 있었다.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혹은 어떤 영화를 보고 위로를 느낀다는 말을 비웃
집도 외롭다혼자 있는 집에 들어선다. 집도 혼자 나도 혼자다. 집은 영원히 이 자리에서 혼자 있을 것이고 나는 혼자서 쏘다니고 혼자서 집과 함께 머문다. 집이 아무리 내 바깥을 둘러싸고 있어도 집도, 나도 영원히 혼자일 것 같다. 집은 가족이 있어야 채울 수 있는 것일까.원룸에 살다 보면 집이라는 것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또 열 수 있는 문이 있는 무언가였다. 그러나 이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있는 것은 바깥이다.어느새 1인 가구라는 어색한 말이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T.S 앨리엇 일부.4월이 오면4월을 맞이하며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하고 깊게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안나왔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T.S 엘리엇의 시구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고, 만우절 장난도 재미없게 느껴졌다.문득 달력을 보고 불편함의 근원이 뭔지 깨달았다. 4월 16일이라는 날짜는 바로 그날이었다. 잊을 수 없는 슬픔의 날.2년 전 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게시글
준비 지난 토요일 오전 8시 50분.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잠을 설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영 잠이 오지 않았다. 푸석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선다. 화장을 하는 손이 덜덜 떨린다. 지금 틀리면 난 또 세수를 해야 하고 아마 결혼식에 늦겠지? 내가 이 정도인데 당사자는 얼마나 떨릴까? 등등 별별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화장을 다 한 후에는 미용실에 갈 것이다. 일 년 가까이 머리를 자르지 않았는데 오늘을 핑계삼아 하기로 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대충 살자! 지난해 말, 트위터를 중심으로 대충 살자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눈팅’은 하지만 SNS를 하지 않아서 그 유행을 아주 늦게 알게 되었는데, 작년 기준으로 만 53세인 386세대 우리 아버지마저 ‘대충 살자’를 언급하자,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곱씹게 되었다.대충 살자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대충 살자 라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열심히만 살아버린 세대라는 사실이었다. 약간의 개인 차는 있겠으나 우리 세대(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한국에서 1월 초에 개봉한 영화가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었던 러시아 영화 다. 영화는 흑백인 데다, 러시아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 관객을 몰이하는 요소는 적다. 덕분에 관객은 많지 않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자아내는 느낌이 좋았다.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하는 단어인 ‘레토(Лето)’는 극중 인물이 부르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80년대말 소련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키노(Кино)의 보컬이자 고려인으로도 유명한 빅토르 초이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 혹자는 ‘자본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나는 그만큼 자유로울 자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멈춰 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멈춰 서고 마는 것.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잠들어 버리는 것.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만 할 수 없는 것. 늘 커다란 간극이 있는 이성과 본능 사이. 빈 페이지는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아니, 하는 것 같다. 빈 페이지를 마주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잠시 마음이 착잡해 졌다가 이내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한다.가끔은 비어있는 순백의 페이지가 내 머릿속을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내가 느끼기에 11월은 ‘연락의 계절’이다. 사람은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1년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려 든다. 11월의 갑작스레 차가워진 공기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스스로가 보낸 한 해를 되돌아보고 후회되거나 매듭 짓지 못한 인연에게 연락을 하고, 11월 말에서 12월 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만남을 가지려 한다. 그러려면 11월초부터 중순까지 약속을 잡기 위한 연락을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11월에는 의외의 연락이 나를 찾기도 한다.그런 연락들을 피해서, 어쩌면 스스로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사실은
내가 아직도 DVD를 만들지 못한 이유영화는 개봉을 통해 스스로의 완성을 만인에게 알린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상업 영화에 국한된 것이다. 흔히 독립 영화라고 부르는, 남의 자본을 사용하지 않은 영화가 완성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징표가 있어야 할까? 독립영화들은 대개 공공적 성격의 자본이나 본인의 사재를 털어 만들어진다. 따라서 개봉을 하고 IPTV로 넘어가는 일반 상업영화처럼 개봉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단편 영화라면?사실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감독 본인 외에는 누구도 완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쨌든 그러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