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열정을 품는 게 가능할까.내가 즐겨보는 미드 Bones의 한 대사다. 그 회차의 에피소드는 가물가물한데 이 대사만은 머리에 남았다. 아마 내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저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현재 직장에서나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저런 예가 있었던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며칠 전, 직장 동료와 회사 메신저로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화제가 살짝 번졌는데 새삼 조직생활에 대한 적성 문제였다. 우리 둘 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없었다면 그냥 이렇게 사는
얼마 전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냈다. 하루를 온전히 쉬는 걸로는 올 해의 첫 번째 연차였다. 학교도 아닌 유치원 졸업식에 고모가 휴가까지 내고 간다는 게 오버인가 싶었지만, 참석여부에 대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첫째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에는 둘째 조카도 다니고 있어 졸업식뿐 아니라 수료식도 거행되었고, 양가의 첫 손녀 유치원 졸업식 축하를 위해 양가 어르신들을 비롯한 (조카의) 이모까지 출동한다는 말에 질 수 없었다. 나는 집안의 첫째지만 여태(?) 시집을 못 간 탓에, 나의 첫 조카는 우리 집에서 (둘째 조
아직 산의 매력을 모르는 나는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바다가 왜 더 좋은지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산보다는 바다가 좋은 경치를 좀 더 빠르고 쉽게 내주는 것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희한하게 산은 오를 때마다 목적 지점까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제대로 즐긴 일이 별로 없었다.이번 연수 장소는 사방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 몇 걸음만 걸어도 살짝살짝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숲 테라피를 하기 위해 강사님과 동행한 짧은 산행에서 아무런 목표 없이 쉬엄쉬엄 산을 오가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강사님은 중간중간
얼마 전 서류를 올려놓으려고 지점장님의 자리에 간 적이 있다. 지점장 실이 따로 없어서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계시는데 그 자리에 서니 (기둥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는 중간 책임자를 제외하고) 지점 직원들 자리가 한눈에 보였다. 사무실이 크지도 않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잘 보여서 깜짝 놀랐다.상석의 view를 보고 나니 자리의 권력이 이런 건가 하는 실감이 들었다. 직원 전부가 회사에서 나눠준 잠바만 입고 있었다면 판옵티콘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창을 등지고 앉는 책임자들은 주식창을 수시로 열고 핸드폰 게임을 한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서울에서의 교육 연수 4일 차다.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철에서 앉아 간 기억이 없다. 특히 첫날은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될 역에서 잘못 내려 출근길 2호선의 위력을 잠시 느끼기도 하였다. 텅 빈 지하철로 출퇴근을 해도 쉽지 않을 판에, 이 많은 이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매일매일 견디는 것일까. 단 몇 분만에 먹고사니즘과 heroism에 대한 숙연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어제 날짜로 에누리 없는 입사 13년 차가 되었다. 학생으로 따지면 초중고를 다 졸업하고도, 대학 1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 긴긴 세월 동안 그
몇 년 전부터 생일에 대해 이중적인 심리를 갖게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 여기에 한 살 더 추가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 했다가도 막상 생일 당일이 되면 감상적 혹은 감정적이 되고 만다. 이번 생일에도 역시 그랬다. 오전에는 눈발이 펑펑 흩날리더니 오후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생일을 맞이하는 내 감정선을 고조시켰다. 이런 증상을 인지하고나서부터 생일에는 연차 휴가를 내곤 했다.출근을 하면 기분 잡치는 일이 반드시 벌어지고 마는 불행한 K-직장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세상에 던져진 날만큼은 마음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의료비로만 100만 원 넘는 지출을 했다. 몇 개월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치료가 필요한 몇가지 질환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원인 모를 복통과 잔병치레 말고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나는 건강을 과신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타고난 건강은 관리 없이도 쭉 유지될 줄 알았고, 건강한 상태는 언제나 디폴트로 깔고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강검진을 신청하라는 회사 공지가 날아올 때면 아 벌써 돌아왔네 하며 (그 중요한 일을) 귀찮아하곤 했다.그러다 3년 전 건강검진에서 발견되었던 종양을 1년간 방
마흔의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마음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굳이 타인의 마음까지 운운할 필요가 없는 것이 누가 뭐래도 내 것임이 확실한 나의 마음일 때조차 마음이라는 것은 늘 어렵고 또 어려웠다.'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라는 이 모순적이고 무책임한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 건 나이가 들고나서부터였다. 마음이 관장하기로 작정한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매번 무능했고, 항상 패배했다. 상황과 국면이 변한 마당에도 움직이지 않겠다 고집부리는 마음을 기다리는 건 일
최근에 한 소설가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 작가의 소설 제목은 하나만 알고 있었고, 그마저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일단 신청을 하고 강연장소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강연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책들을 검색했고, 단편소설 한 편을 벼락치기하듯 읽어 내려갔다. 사랑에 빠진 이의 감정이 잘 묘사된 사랑 이야기였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헤어짐 이후 헤매는 소설 속 인물의 모습이 나와 닮아 강연을 빨리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된 리액션을 가진 방청객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 가며 작가의 말을 경청하다
2021년 12월 중순, 신문을 읽다가 "내년 마흔인데 10명 중 7명은 집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맞닥뜨렸다. 사십 대를 앞둔 질풍노도의 시기에 조바심 들게 하는 이 기사는 뭐람 하며 첫 문장을 확인했더니 '내년이면 40세가 되는 1983년생 가운데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10명 중 3명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쓰여 있었다. 일단 내 상황이 10명 중 7명에 속한다니 다행인 건가 하면서도, 수많은 과업들에 이젠 주택 소유주마저 추가해야 하는구나 싶어 숨이 턱 막히었다.그 뒤로 이어지는 통계청 분석은 확실히 내 목을
푹푹 찌는 여름이 시작되고 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최근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일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 솟구쳐 오른 애사심 때문이라고 하면 좋으련만...여름에는 사무실만큼 시원하고 쾌적한 곳이 없기에 원래 여름휴가를 잘 안 가는 편이다. 그러다 9월이 되니 거짓말처럼 나다니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나에게 쉼을 주기로 한 첫날, 나는 미술로 하루를 시작해 음악으로 하루를 맺었다. 정말 오랜만에 행복감으로 마음이 꽉 차 올랐다. 나름대로 국어와 사회와 과학을 좋아했던 범생이었지만, 살아 보니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유효했던
얼마 전 친한 동생과 카톡으로 MBTI 얘기를 하며 서로의 유형을 추측하다가 "누나는 S(현실, 실용) 일 거고..."라는 말을 들었다.- 어? 나 비현실의 끝판왕인데 나 현실적으로 보이는구나? 어찌 보면 성공인 건가?- 근데 진짜 비현실적인 사람은 공공기관 10년 넘게 못 다녀. 그렇게 끝판왕인 사람은 ㅋㅋ 그런 사람을 못 봐서 그래. 그가 툭툭 던지는 말 마디마디 다 뼈를 때려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맞지. 누가 봐도 나의 궤적은 현실에 발을 찰싹 붙이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온 삶이었지.이십 대 후반의 나는 세상의 잣대에서
'조직의 목표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니다.' - 세스고딘, 린치핀10년 넘게 조직에 몸을 담고 나서 곱씹어 보니 조사 하나까지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이 조직의 시스템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부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정확한 정의조차 모르는 것 같아 몇 년 전 공공기관의 의미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다니는 회사는 법이 정한 의미의 공공기관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공공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누가 어느 회사 다니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지 맘 둘 곳 없는 척박한 회사에도 내가 좋아하는 동료 직원들이 몇 명 있다. 나보다 1년 입사 선배이자, 학번은 같은 L차장도 그중 한 명이다. 회사에서 선후배로 만난 관계지만 비슷한 점이 많아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나와 달리 회사에 애정이 많고, 업무 능력이 뛰어남에도 뒤늦게 승진을 했다. 내가 상사라면 똑똑한 그부터 데려다 쓸 거 같은데, 회사는 늘 정반대로 그를 대접했다. 조직이 굴러가려면 이런 사람도 필요하고 저런 사람도 필요한 것쯤은 이제 나도 안다. 다 L차장 같을 수없고, 다 내
오후 6시 땡,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셔츠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소재가 리넨 이어도 그렇지, 분명 아침에 곱게 다려 입고 나온 옷이었다. 여기저기 가늘고 굵은 주름이 패턴처럼 가득 차 있고 볼품없게 꼬깃해진 셔츠는 아침과는 전혀 다른 옷... 아니 그냥 천 쪼가리였다.먹고 살겠다고 옷이 이렇게 구겨지는지도 모르고 일했구나... 실로 오랜만에 나 자신이 대견하고 밉지 않은 순간이었다.사무실에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일의 의미를
6월 첫 주에 받았던 건강검진 결과지가 집에 도착했다. 내 몸 여기저기 나도 좀 신경 써달라는 듯 조금씩 문제가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단 관리 없이 이 정도면 선방했네 하면서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내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건강검진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작년에 수술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 건강검진 선택 항목에서는 그동안 안 해봤던 스트레스검사를 해봤는데 특히 그 결과가 몹시 처참했다. 스트레스 저항도, 스트레스 지수, 피로도 모두 "매우 나
최근에 듣기 시작한 수업의 강사님이 (수업시간에 많이 언급할 예정이라며) 보길 권한 영화가 있다. 정기구독하는 OTT에서는 제공하질 않아 어쩌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영화 TV채널에서 방영을 해주었다. 그 영화 제목은 폴:600m다. 선생님이 '죽은 남편의 유골을 뿌리러 600m 타워에 올라가는 한 여자의 얘기'라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 세상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를 죽음으로 상실했을 때의 경험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류의 고통
목숨을 위협하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음에도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은 기분이 든다. 심지어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 불행한 표정이 아닌 것만으로도 부럽단 생각을 한다. 웃고 있지 않아도, 그저 표정이 편안한 것만으로 저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며칠 전 친한 동생과 술을 먹다가 울고 말았다. 실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지금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게 싫은데, 특히 매일 가야 하는 회사가 너무 싫어 (학교 가기 싫은)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언니가 지금
오랜만에 결혼식 참석을 위한 외출을 한다. 계절의 여왕 5월 답게 날씨가 찬란하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 평소 잘 안 입는 치마까지 꺼내 입었는데, 적당한 온도와 세기를 가진 봄바람이 치맛자락을 흔들고 내 마음도 같이 흔든다. 측근들은 사실상 거의 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주말에 결혼식 참석 이벤트는 이제 내게도 흔치 않은 일이다. 오늘은 한 학번 위인 선배 오빠의 결혼식이다. 엄청 친하다고 할 순 없지만 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선배다. 사실 나는 이 오빠하고는 대화를 길게 해 본 적이 없다. 근데 항상 오빠에 대해 좋은
회사 직원 중 하나가 포르쉐를 샀다. (정확한 가격은 당연히 모르고) 포르쉐가 비싼 차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그래?라는 반응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워낙 차에 관심이 없어서 별 감흥이 없기도 했고, 업무 퍼포먼스 최악에 인성까지 터무니없는 그 직원의 소식 따위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직원이 포르쉐 중에서도 카이엔을 샀다는데 그 이름도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포르쉐 타이칸은 동생 친구가 타고 다녀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직원의 포르쉐 구입이 다른 직원들에게는 엄청난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