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산의 매력을 모르는 나는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바다가 왜 더 좋은지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산보다는 바다가 좋은 경치를 좀 더 빠르고 쉽게 내주는 것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희한하게 산은 오를 때마다 목적 지점까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제대로 즐긴 일이 별로 없었다.이번 연수 장소는 사방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 몇 걸음만 걸어도 살짝살짝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숲 테라피를 하기 위해 강사님과 동행한 짧은 산행에서 아무런 목표 없이 쉬엄쉬엄 산을 오가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강사님은 중간중간
연애 프로그램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킨 ‘진주 PD’가 이번에는 남매의 연애를 담은 를 들고 돌아왔다. 남매와 연애의 조합만으로도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같은 호적을 쓰는 남매의 연애를 가까이서 지켜봐야 한다는 점은 채널을 고정할 만한 소재이기도 했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참 유치해진다. 이는 대중들이 각 방송사의 말 많고 탈 많은 연애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 프로그램이 인플루언서들의 연예인 등용문으로 전락해 버렸
대한민국 최고 프렌차이즈는 단연코, ‘임대’다. ‘공’이 건물의 주연이 되는 부조리극은 빈부 구분 없이 절찬 상영 중이다. ‘엑스트라 공’(空)이 고도를 기다리는 듯, 임대의 시간이 끝날 줄 모른다. 사는(live) 곳도, 사는(buy) 곳도 공공(空空)하다.빈 것들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빌 것들이 성실히 쌓이고 있었다. 시공사, 건설사들은 비지 않길 바라겠지만, 대구 반고개역 어느 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0.07:1이었다. 높은 분양가 탓만은 아니었다. 대구는 미분양 무덤으로, 전국 미분양 물량 17%가 몰려 있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 서류를 올려놓으려고 지점장님의 자리에 간 적이 있다. 지점장 실이 따로 없어서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계시는데 그 자리에 서니 (기둥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는 중간 책임자를 제외하고) 지점 직원들 자리가 한눈에 보였다. 사무실이 크지도 않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잘 보여서 깜짝 놀랐다.상석의 view를 보고 나니 자리의 권력이 이런 건가 하는 실감이 들었다. 직원 전부가 회사에서 나눠준 잠바만 입고 있었다면 판옵티콘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창을 등지고 앉는 책임자들은 주식창을 수시로 열고 핸드폰 게임을 한다
처음에 논객에 글을 낸 게 8년 전이다. 청춘을 주제로 글을 써보라는 공모전이 시작이었고, 현대문학에 흥미가 떨어지며 에세이, 웹소설, 독립출판 등으로 시선을 돌렸던 내게 좋은 기회였다. 냅다 글을 써서 투고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청춘이 뭔진 모르겠는데, 그게 술자리의 ‘짠’이라면 죽어도 못 준다 이놈들아!”인 글이었다. 수상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대학교의 과제도서실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내 머리에 꽃만 꽂으면 완벽해보일 것 같았는지 심히 수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던 후배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올해가 되면서 나는 스물 넷이 아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서울에서의 교육 연수 4일 차다.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철에서 앉아 간 기억이 없다. 특히 첫날은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될 역에서 잘못 내려 출근길 2호선의 위력을 잠시 느끼기도 하였다. 텅 빈 지하철로 출퇴근을 해도 쉽지 않을 판에, 이 많은 이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매일매일 견디는 것일까. 단 몇 분만에 먹고사니즘과 heroism에 대한 숙연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어제 날짜로 에누리 없는 입사 13년 차가 되었다. 학생으로 따지면 초중고를 다 졸업하고도, 대학 1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 긴긴 세월 동안 그
Y2K와 더불어 레트로 감성이 바짝 유행이었다. 옷이란 자고로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유행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려웠다.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옷 몇 벌을 요즘 스타일에 맞춰 사입으니 부모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어? 그거 우리 때 유행하던 건데"확실히 예전 스타일이 인기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멘트였다. 그런데 과연 옷만 그럴까? 체감하기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곡이 쏟아져 나오는 음악 산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샘플링 곡이 사랑받아 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샘플링이란 표절과 엄연히 다른 개념으
장례식장에서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 강남에 갔다가 어떤 매장에서 말 한 마리가 학대당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는 작은삼촌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런 곳이 있냐며 다들 핸드폰을 검색했고, 알고 보니 탬버린즈 매장에 홍보용으로 전시된 말 모형을 보신 거였다.아내의 외할머니께서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밤 버스를 끊고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명절을 보냈다. 명절이어서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여 앉아 가족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됐다.결혼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아내의 친척들과 제대로 이야기
내게는 4살 터울의 누나가 있다. 게임 회사의 VFX아티스트로 일하고 있고, 최근에는 이직을 위해 블리자드에 면접을 보고선 합격했다. 해외 회사들은 면접이 굉장히 긴 편인데 다행히 HF팀은 누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지막을 제외하곤 빠르게 면접 일정이 소화되었다. 다만 지금에야 이렇게 말하지, 1월 말에 누나는 내게 본인이 지원한 회사에 대해서 메시지를 보냈었다. “내 채용 담당 매니저 짤렸네. 왠지 이메일에 대답이 계속 없더라니.” 블리자드가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미국은 정리해고가 결정되면 그 날 바로 짐을 싸고 나가야 할 정도
‘얼죽아’가 민족문화라면, 나는 이민족이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내 노동자로서, 커피를 마실 때 날씨 영향을 받지 않았다. 추울 때 따뜻했고, 더울 때 시원했다. 실외에서는 커피 마실 일이 없었다. 여름에 실외에서 무언가를 마셔야 한다면, 시원한 탄산음료이지 커피는 아니었다. 물론, 탄산음료에도 얼음을 넣지 않았다. 얼음은 음료를 마실 때 걸리적거렸다.식수도 미지근하게 마셨다. 물을 끓이든, 생수를 사든, 냉장고에 물을 넣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이유는 수분 보충이었고, 찬물을 마시면 수분을 충분히
그날은 유난히도 힘든 날이었다. 아침 9시에 중요한 발표를 마쳤다. 수업을 다 듣고, 서울로 이동해 대외활동까지 마치니 저녁 10시였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한참을 기다려 탔다. 출발지였던 만큼 승객은 얼마 없었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의자는 뒤로 젖혀있었다. 전 사람이 원복하지 않고 내렸나 보다. 자리에 앉았다. 꼿꼿하던 옆 의자보다 편했다.서울역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홍대로 갈수록 승객들이 많아졌다. 사람 많은 금요일 저녁이다. 송도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는 몇 없다.
2022년도 2월말, 코로나에 걸렸다. 사실상 아주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백신을 2차까지는 맞은 상황이었고, 별 탈 없이 목만 좀 부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다시 멀쩡해졌으니까. 누나처럼 후각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지인처럼 2주를 앓아누운 것도 아니었기에 격리는 생각보다 답답한 일이었다. 1주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운동을 나가고, 출근을 하고, 글을 쓰고, 영상을 찍고. 밥도 잘먹었고, 사람도 잘 만나고 다녔고, 차분히 이직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3주가 지났을까. 새벽 3시, 천식이
내겐 열등감이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평소에는 뭘 하고 지내는지 잊고 살다가, 어쩌다 연락이 닿으면 지지고 볶고 싸우는 친구다. 그때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절교를 선언하지만, 어느새 다시 나타나 하이에나처럼 내 곁을 빙빙 돈다.솔직히 말하면 이 친구에겐 신세 진 게 많다. 날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아쉬울 때 또 자길 찾으리라는 걸 알기에,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겠다며 기다리는 것 같다.고등학교 땐 나보다 성적이 좋은 짝꿍을 이기기 위해 놈을 이용했다. 짝꿍은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했다. 그
몇 년 전부터 생일에 대해 이중적인 심리를 갖게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 여기에 한 살 더 추가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 했다가도 막상 생일 당일이 되면 감상적 혹은 감정적이 되고 만다. 이번 생일에도 역시 그랬다. 오전에는 눈발이 펑펑 흩날리더니 오후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생일을 맞이하는 내 감정선을 고조시켰다. 이런 증상을 인지하고나서부터 생일에는 연차 휴가를 내곤 했다.출근을 하면 기분 잡치는 일이 반드시 벌어지고 마는 불행한 K-직장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세상에 던져진 날만큼은 마음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광고 배너가 옷으로 도배되었다. 옷을 사려고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들락거린 탓이다. 무슨 옷을 사고 싶은 지는 몰랐다. 그냥 겨울옷을 사고 싶었다. 전시된 상품들을 보고 또 보니 사고 싶은 것의 범주가 좁혀졌다. 기모 들어간 통 넓은 바지와 그에 어울리는 오버핏의 상의가 목표가 되었다. 마음에 꼭 맞는 옷을 내 구매력과 타협하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품은 내 욕망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넘쳐났고, 내 구매력 대비 내 눈높이는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사지 못했다. 원초적인 질문, 저 옷이 내게 필요한가?내게 필요한
대개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마지막 주에는 사내에 휴가자가 많다. 그간 사용하지 못한 휴가를 몰아 쓰는 것이다. 휴가를 올린 직원들은 오늘이 올해 마지막 출근이라며 새해 덕담을 건넨다. 휴가를 소진해 자리에 남아 있는 직원들도 유쾌하게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다. 부산했던 사무실이 조용해진다. 평소보다 오는 전화도 거는 전화도 줄어든다. 우리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에도 휴가자가 많기 때문일 테다. 이게 상례인데, 이번 연말 연초엔 유독 바빴다. 보고할 일도, 결재받을 사안도 많았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이테가 쌓이다 보니, 보고받을 일
최근 ‘나락’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시작은 ‘나락도 락(rock)이다’라는 밈이다. 이 밈은 티셔츠나 스티커 등 굿즈로 만들어지며 MZ 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쓰이다 ‘피식대학’이란 유튜브 채널이 콘텐츠로 활용하면서 그야말로 대세가 됐다. 유쾌한 코미디를 표방하는 이 채널은 ‘나락 퀴즈쇼’라는 콘텐츠를 종종 만든다.기본 포맷은 제목 그대로 ‘퀴즈’쇼다. MC가 문제를 내거나 질문을 하면 게스트는 답을 맞히거나 대답을 하면 된다. 다만 질문이 좀 짓궂다. 일반 퀴즈 쇼라면 절대 다루지 않을 정치나 종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신년 계획에 실패해 왔다. 파워 J인 나는 새해만 되면 계획을 세웠고, 빈번히 실패했다. 계획 실패에 관해선 권위자다.성공적인 신년 계획을 세우는 방법은 어렵고 주제넘는다. 오히려 내가 그간 잘해왔던 '어떻게 하면 신년 계획이 실패하는지'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반면교사랄까. 이 방법만 피하면 신년 계획을 망치는 일은 피할 수 있다.실패한 자기 객관화누구나 학교 다닐 때 방학 계획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계획을 짜는 당시에는 뜨겁다. 무슨 일이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계
“탕후루.”실패했다면,“마라탕.”둘 중 하나에 웃을 확률은 90%가 넘어간다, 여학생은. 아무 맥락 없이 저 단어만 말해도 표정이 밝아지며 자신의 식사(食史)를 공유한다. ‘여중생’에게서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대령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여학생들은 옛날 목욕탕 아줌마들처럼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나누는 것으로 친밀감을 증명했다.남학생에게 저 단어를 말했다면 ‘뭐 어쩌라고?’ 하며 한심한 듯 쳐다볼 확률이 높다. 음식을 소재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남중생의 관심사는 19금이 절대적이고, 건전하면 게임
처음엔 그랬던 것도 같다. 멋있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주변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사람,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보푸라기도 군살도 없는 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였을까. 주말엔 자기계발 책도 읽고 그랬다.그 멋있던 선배들이 제 이익을 위해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자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다음으로 동경하게 된 사람은 주변을 잘 챙기는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들은 이해관계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움직였다.'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