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김희태] 우리 역사의 각 왕조별 왕릉에 대한 답사를 다녀보면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것 중 십이지신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십이지신상은 열두 동물을 형상화 한 것인데, 문화재 가운데 이 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신라왕릉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37곳의 신라왕릉 가운데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사례는 성덕왕릉, 경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진덕여왕릉 등으로, 이 밖에 왕릉은 아니지만 김유신 묘와 구정동 방형분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신라왕릉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보면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역사와 관련한 탐방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문화재를 접하게 된다. 처음 문화재를 접할 때 주목해서 보는 건 문화재의 이름이다.우리가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듯 문화재도 불리는 명칭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는 편이다. 보통의 경우 문화재 앞에 지역명이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신라 왕릉의 경우 '경주(지역) + 무열왕릉(문화재)'하는 식이다. 또한 사찰의 경우 '경주(지역) + 불국사(문화재)'로 불리는데, 가령 불국사 내에 문화재가 있을 경우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고분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을 기준으로 피장자가 밝혀진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의 경우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지석을 통해 피장자가 명확하게 규명된 사례다. 또한 삼국의 항쟁과 나당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중국과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이전과 달리 고분에 비석을 세우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경주 무열왕릉과 문무왕릉, 김인문묘 등에 비석이 세워졌다. 따라서 왕릉 앞에 비석을 세운 경우 명문을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역사와 관련한 글을 쓰다보면 가장 휘발성이 높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글이 고대사 분야다. 특히 ‘사이비 역사학(=유사역사학)’을 추종하는 이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중 하나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른바 이다. 자칭 재야사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본래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학설의 이견이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그 순간 나는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탈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여러분들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어떤 것을 가장 중점에 두시는지?같은 내용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란 해석의 학문이기에 오늘 우리가 평가하는 현상이 먼 미래에는 다르게 인식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좀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를 통해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조선왕릉과 달리 고려왕릉의 실물을 보기란 정말 어렵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개경)이 북한 쪽에 자리하고 있어, 개성 인근에 묻힌 고려왕릉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전체 조선왕릉 42기 중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과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厚陵)’도 현 개성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가운데 제릉과 후릉은 빠져 있다. 분단이 만든 역사의 아픈 한 장면이라 할 만하다.이처럼 고려왕릉의 대부분이 개성에 자리하고 있기에 그동안 금단의 영역처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능묘 답사를 다니다 보면 남성과 여성의 호칭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묘표를 보면 대개 남성의 경우 시호, 관직 등과 함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반면 여성(=여인)의 경우 대부분 품계와 함께 성씨만 적혀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숙종 대의 후궁인 ‘희빈 장씨(1659~1701)’다. 사극에 자주 등장했던 ‘장희빈’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희빈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희빈 장씨가 옳은 표현이다. 그녀의 품계(희빈)에 장옥정이라는 본명의 성씨(장)가 붙어 장희빈으로 불린 것이다. 이러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이전의 연재에서 소개한 것(왕릉에는 어떤 ‘석수(石獸)’가 세워졌을까?)처럼 왕릉에는 ‘석수’와 함께 ‘석인상’ 등의 석물이 세워지는데, 시기별로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여기서 석물이라고 하면 양이나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새긴 석수와 문관 혹은 무관 등의 관리를 형상화한 ‘석인상’인데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장명등’을 포함한 ‘망주석’ 등의 석물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오늘은 왕릉의 석인상을 통해 시기별의 변화와 특징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초로 석물이 등장한 신라왕릉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일반적으로 왕릉의 정의는 왕이나 왕비, 대비가 묻힌 무덤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묘와 달리 왕릉의 경우 단어 자체가 주는 신비감이 있는 편이다.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신영복 선생의 을 보면 서오릉으로 소풍을 갔던 일화를 적고 있다.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치고 왕릉으로 소풍 가본 경험은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왕릉은 당대의 철학과 정치, 조각 등의 예술이 총집합이 된 경우로, 당시의 시대를 조명하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 가령 선조의 ‘목릉(穆陵)’은 다른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난번 칼럼인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북한이 팔아먹은 것인가?”를 보고, 어떤 분들은 백두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며 반색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중국 측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내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또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것은 중국 측의 시각으로, 토문강과 두만강은 다르다며 내게 강의 아닌 강의를 했는데, 분명 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송화강으로 흘러가고, 두만강과 서로 다른 물줄기인 것은 맞다.앞서 밝힌 것처럼 목극등은 토문강, 즉 자신들의 두만강이라 생각한 물줄기에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우리 헌법의 제3조 1항을 보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은 헌법이 규정한 영토 조항과는 맞지가 않은데,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북쪽은 북한이 통치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북한에 대해 반국가 단체이면서 동시에 통일을 추구해야 할 다소 이중적인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은 우리 내부 보혁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손꼽혀왔다.현재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북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수복하지 못한 영토 혹은 실질적 영향력이 미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되는 이순신(1545∼1598)은 여러모로 특별한 인물이다. 그의 승리 요인은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고, 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흔히 이순신을 설명할 때 23전 23승의 화려한 승리만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전승의 행렬은 크게 ‘적의 내부를 알고, 유리한 장소에서 전쟁을 벌이며,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이순신의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전투가 ‘한산도 대첩(1592)’으로, 대부분 ‘학익진’을 기억하는 이 전투의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두드러진 점을 꼽으라면 그동안 병폐로 지목되어 온 지역주의가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체적인 판세를 보면 자유한국당의 궤멸적인 패배와 함께 앞으로의 정치가 지역 구도가 아닌 세대 간의 대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번 선거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지난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온몸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지역주의 타파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그동안 우리 정치 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한 지역주의는 영남과 호남의 갈등으로 표출되는데, 그 근원은 역사를 통해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금은 마늘과 컬링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의성은 과거 진한 12국(=삼국사기는 11국) 중 하나인 조문국(=소문국)이 있던 곳이다. 삼한의 여느 소국처럼 조문국 역시 명확한 기록이 많지 않기에 자세한 왕계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단지 벌휴왕 조를 통해 “185년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라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을 보면 “본래 소문국(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경덕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난 2016년 화성 당성의 3차 발굴조사에서는 특이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흙으로 만든 말 인형인 ‘토제마’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특이했는데, 토제마의 목과 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형태의 토제마가 화성 당성, 그것도 구봉산의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것일까?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말머리 뼈와 ‘呂’자 형태의 제사건물터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납동토성의 경당지구 발굴조사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경당지구의 발굴조사 과정 중에서 ‘呂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금은 부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옛 백제의 고도 사비, 여러 번 수도를 옮겼던 백제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사비백제’로 불리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해 궁남지와 부여 나성,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등 다양한 백제의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백제의 왕릉으로 여겨지는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과 그의 아들 부여융(615~682)의 가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정식 명칭은 ‘의자왕단’이다. 백제 멸망 뒤 중국으로 끌려간 의자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허난성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순왕릉으로 찾아가는 길은 경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왕릉이라는 점과 불과 15년 전만 해도 민통선 내에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다. 물론 지금은 제한된 시간이긴 해도 상시 개방을 하고 있어, 접근성 자체는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진 편이다. 보통 신라의 왕릉이 경주에 조성되는 것에 비해 연천에 조성된 경순왕릉은 그 위치만으로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단순한 능묘가 아닌 해당 문화재에 담긴 의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주의 서남산은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정’을 비롯해 최초 신라의 궁궐인 ‘창림사지’와 ‘일성왕릉’, ‘포석정’ 등 다양한 역사 문화 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남산의 주요 등산 코스 중 한 곳인 ‘삼릉계곡’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세 기의 능인 ‘삼릉’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이 삼릉은 신라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삼릉의 인근에는 ‘경애왕릉’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박씨 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아달라왕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가 쇠퇴하던 시기의 왕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한 동구릉은 말 그대로 아홉 개의 능역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동구릉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능이라면 ‘건원릉(健元陵)’을 꼽을 수 있다.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능역으로 이후 조선왕릉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건원릉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신도비란 해당 인물의 생애와 공적 등을 새긴 비석으로, 보통 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만이 세울 수 있었다. 현재까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남양주에 자리한 ‘봉선사’를 들렀다. 봄이 오는 사찰의 경내는 나름의 운치와 소박한 멋이 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던 나의 눈에 한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비석의 이름은 ‘하마비(下馬碑)’로, 그 순간 왜 사찰에 하마비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보통 하마비는 말에서 타고 가던 사람도, 비석이 세워진 곳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던 것을 상징하는 비석이다. 조선시대 하마비는 대개 궁궐이나 왕릉, 향교나 서원 등에 세워졌는데, 대개 유교적인 것을 지키기 위한 장소나 건축물 등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