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생일에 대해 이중적인 심리를 갖게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 여기에 한 살 더 추가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 했다가도 막상 생일 당일이 되면 감상적 혹은 감정적이 되고 만다. 이번 생일에도 역시 그랬다. 오전에는 눈발이 펑펑 흩날리더니 오후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생일을 맞이하는 내 감정선을 고조시켰다. 이런 증상을 인지하고나서부터 생일에는 연차 휴가를 내곤 했다.출근을 하면 기분 잡치는 일이 반드시 벌어지고 마는 불행한 K-직장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세상에 던져진 날만큼은 마음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광고 배너가 옷으로 도배되었다. 옷을 사려고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들락거린 탓이다. 무슨 옷을 사고 싶은 지는 몰랐다. 그냥 겨울옷을 사고 싶었다. 전시된 상품들을 보고 또 보니 사고 싶은 것의 범주가 좁혀졌다. 기모 들어간 통 넓은 바지와 그에 어울리는 오버핏의 상의가 목표가 되었다. 마음에 꼭 맞는 옷을 내 구매력과 타협하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품은 내 욕망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넘쳐났고, 내 구매력 대비 내 눈높이는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사지 못했다. 원초적인 질문, 저 옷이 내게 필요한가?내게 필요한
대개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마지막 주에는 사내에 휴가자가 많다. 그간 사용하지 못한 휴가를 몰아 쓰는 것이다. 휴가를 올린 직원들은 오늘이 올해 마지막 출근이라며 새해 덕담을 건넨다. 휴가를 소진해 자리에 남아 있는 직원들도 유쾌하게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다. 부산했던 사무실이 조용해진다. 평소보다 오는 전화도 거는 전화도 줄어든다. 우리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에도 휴가자가 많기 때문일 테다. 이게 상례인데, 이번 연말 연초엔 유독 바빴다. 보고할 일도, 결재받을 사안도 많았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이테가 쌓이다 보니, 보고받을 일
최근 ‘나락’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시작은 ‘나락도 락(rock)이다’라는 밈이다. 이 밈은 티셔츠나 스티커 등 굿즈로 만들어지며 MZ 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쓰이다 ‘피식대학’이란 유튜브 채널이 콘텐츠로 활용하면서 그야말로 대세가 됐다. 유쾌한 코미디를 표방하는 이 채널은 ‘나락 퀴즈쇼’라는 콘텐츠를 종종 만든다.기본 포맷은 제목 그대로 ‘퀴즈’쇼다. MC가 문제를 내거나 질문을 하면 게스트는 답을 맞히거나 대답을 하면 된다. 다만 질문이 좀 짓궂다. 일반 퀴즈 쇼라면 절대 다루지 않을 정치나 종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신년 계획에 실패해 왔다. 파워 J인 나는 새해만 되면 계획을 세웠고, 빈번히 실패했다. 계획 실패에 관해선 권위자다.성공적인 신년 계획을 세우는 방법은 어렵고 주제넘는다. 오히려 내가 그간 잘해왔던 '어떻게 하면 신년 계획이 실패하는지'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반면교사랄까. 이 방법만 피하면 신년 계획을 망치는 일은 피할 수 있다.실패한 자기 객관화누구나 학교 다닐 때 방학 계획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계획을 짜는 당시에는 뜨겁다. 무슨 일이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계
“탕후루.”실패했다면,“마라탕.”둘 중 하나에 웃을 확률은 90%가 넘어간다, 여학생은. 아무 맥락 없이 저 단어만 말해도 표정이 밝아지며 자신의 식사(食史)를 공유한다. ‘여중생’에게서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대령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여학생들은 옛날 목욕탕 아줌마들처럼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나누는 것으로 친밀감을 증명했다.남학생에게 저 단어를 말했다면 ‘뭐 어쩌라고?’ 하며 한심한 듯 쳐다볼 확률이 높다. 음식을 소재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남중생의 관심사는 19금이 절대적이고, 건전하면 게임
처음엔 그랬던 것도 같다. 멋있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주변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사람,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보푸라기도 군살도 없는 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였을까. 주말엔 자기계발 책도 읽고 그랬다.그 멋있던 선배들이 제 이익을 위해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자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다음으로 동경하게 된 사람은 주변을 잘 챙기는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들은 이해관계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움직였다.'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
문득, 우리 엄마가 캣맘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나는 캣맘을 혐오할 수 없어졌다.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에 중립적이었다. 길고양이에 대한 측은지심도 이해되었고, 길고양이가 유해조수인 사실도 이해되었다. 당장 나와 관련 없었기에 가치 판단을 유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하철 역 앞에서의 그 장면 이후로는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행위를 측은지심으로 읽지 않았다.초겨울이었다. 바람이 강해 어딘가에서 날려 온 비닐봉지가 도로를 휘저어대던 날이었다. 지하철 역 입구에 노파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양말, 스타킹, 면봉, 때수건 등 가벼운 잡
아들이 낮잠을 잔다. 실컷 뛰어놀고 간식도 잘 먹고,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청한다. 천사가 따로 없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이다. 아빠인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나는 산타 할아버지다. 발신인은 아빠가 아닌, 산타 할아버지다.아직 글을 읽기엔 너무 어린 아기지만, 산타 할아버지의 입으로 편지를 들려주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 내일의 대독(代讀)이 기대된다. “우리 왕자님! 오늘 말 잘 들으면, 코~하고 있을 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이랑 편지를 갖고 오실 거야”라고 말할 생각에 벌써 신이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사력을 다해 달리는 한 축구선수. 그는 결국 상대편 골망을 흔든다. 그러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눈물을 흘리는 것. 그토록 간절했던 골일까. ‘슈틸리케의 황태자’라 불리던 그의 눈물이 유달리 애처로워 보인다. 경기 종료. 그 선수는 인터뷰를 한다. “정말 제가 많이 존경했거든요.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나도 꼭 장인어른의 사위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장인어른이 경기 당일 새벽에 영면한 것. 빈소를 지키는 것보다 그라운드에서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바라셨을 장인어른을 위해 그는 서글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애장품을 하나씩 가져와 주세요”한 연말 모임 주최자의 요구였다. 뭐든 고르면 되리라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방안을 살폈다. 키보드와 책 몇권, 각종 영양제들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매일 먹고 사용하는 물건들이긴 하지만, 내겐 애장품보단 호미나 몽키스패너 같은 공구에 더 가까운 물건들이다. 밥벌이와, 밥벌이를 감당할 몸을 유지하기 위한 공구들을 애장품이랍시고 가져가고 싶진 않았다.이번엔 침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내 자전거와 아령, 책들 따위의 공구들이 있었다. 이쯤되니 막막함보단
최근에 의료비로만 100만 원 넘는 지출을 했다. 몇 개월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치료가 필요한 몇가지 질환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원인 모를 복통과 잔병치레 말고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나는 건강을 과신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타고난 건강은 관리 없이도 쭉 유지될 줄 알았고, 건강한 상태는 언제나 디폴트로 깔고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강검진을 신청하라는 회사 공지가 날아올 때면 아 벌써 돌아왔네 하며 (그 중요한 일을) 귀찮아하곤 했다.그러다 3년 전 건강검진에서 발견되었던 종양을 1년간 방
"지금도 과한데 여기서 뭘 더 해줘요?"저출산을 소재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이웃 회사에서 임금삭감 없이 2시간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도입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부럽다고 하자 옆에 있던 선배직원이 저렇게 말했다. 공격적인 어투에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왜 저런 반응을 하는 거지?저출산 극복이 국가적 과제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조직 안에선 오히려 출산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강해지고 있다. 비혼자의 목소리가 높아져서다. 육아휴직에 들어가는 직원을 보며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곧 사회생활을 시작할 학생 여러분들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쉽게 사과하지 말라는 것을 당부합니다”10년쯤 전 철학과 전공 수업 시간이었다. ‘이게 나올 말이 아닌데?’ 싶은 한 마디에 졸음이 달아났다. 내 기억에 따르면, 당시 강사가 펼친 대강의 논리는 이러했다. 먼저 사과한 당신은 아마 선한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객관적으로 잘못한 바가 없어도 마음의 상처를 호소하는 누군가에게 선의를 담아 먼저 사과를 건넸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객관적으로 그릇된 언행을 한 상황에서의 사
마흔의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마음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굳이 타인의 마음까지 운운할 필요가 없는 것이 누가 뭐래도 내 것임이 확실한 나의 마음일 때조차 마음이라는 것은 늘 어렵고 또 어려웠다.'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라는 이 모순적이고 무책임한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 건 나이가 들고나서부터였다. 마음이 관장하기로 작정한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매번 무능했고, 항상 패배했다. 상황과 국면이 변한 마당에도 움직이지 않겠다 고집부리는 마음을 기다리는 건 일
“그냥, 즐겁잖아요.”왜 빼빼로데이를 챙기느냐는 질문에, 초등학교 5학년짜리의 대답이었다. 초등학생의 무지성으로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날은 마음에 걸렸다. 반문이 들었다. 지성은, 나를 즐겁게 만드는가?기본적으로 기념일들이 번거롭다. 그나마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조금 양보해서 개천절까지는 내가 한국에 태어난 이상 국가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물려받는 특수 의무임에는 동의했다. 이날을 기념함으로써 나는 내가 한국인임을 자각하고 타자와 연대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한 기념일들은 내가 번거로워질 것이 없어서 좋았다
내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은밀한 취미가 있다.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녹음하고 반복해 듣는 일이다. 아내조차 내 핸드폰에 열 개가 넘는 파일이 저장돼 있다는 걸 모른다.퇴근길 편의점에서 500mm 생수 한 병을 산다. 그리고 집 근처 코인노래방에 들른다. 신해철과 김광석, 유재하의 노래를 부른다. 녹음 버튼을 누른 뒤 이어지는 4분간 죄 없는 핸드폰은 절제를 모르는 에코와 음이탈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녹음한 노래는 주로 출퇴근길에 듣는다. 지하철 소음에 질세라 음량을 키우다 보면 갑자기 블루투스가 끊겨 지하철 가득한 사람들
우리는 그곳을 생활관이라 불렀다. 실제로 그 10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1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생활했으니, 어쩌면 가장 적절한 단어였는지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생활관이라는 말 대신 그곳을 ‘방’이라고 부르려 한다.그 방에는 항상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1년 365일 라디오는 꺼진 적이 없었다. 누가 언제부터 틀어 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이미 그 방에 처음 간 날부터 나오는 날까지 라디오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매일 그 빨간색 라디오에선 음악과 말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그 방에 누가 있든, 없든 말이다. 그 방에서
최근에 한 소설가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 작가의 소설 제목은 하나만 알고 있었고, 그마저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일단 신청을 하고 강연장소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강연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책들을 검색했고, 단편소설 한 편을 벼락치기하듯 읽어 내려갔다. 사랑에 빠진 이의 감정이 잘 묘사된 사랑 이야기였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헤어짐 이후 헤매는 소설 속 인물의 모습이 나와 닮아 강연을 빨리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된 리액션을 가진 방청객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 가며 작가의 말을 경청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초등학생이 이어폰 없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시끄러웠지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가르쳐 주었을 때, ‘왜요?’나 ‘아저씨가 뭔데요?’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초등학생은 합법적으로 마음껏 무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괜찮았다. 그 무례는 언젠가 칼 맞을 수 있다는 기대로 참아졌다. 바야흐로 체념사회다.회광반조(回光返照)의 시간이다. 한국사 최초로 대한민국은 ‘k-’로 표상되는 문화제국주의 위상을 누리는 중이다. 가장 좁은 영토에서 가장 큰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