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역사는 있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도 지나온 길을 누군가는 기억한다. 그 시간과 기억이 역사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추억하는 일은 시간과 역사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현재를 확인하고, 상처와 아픔도 치유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도 발견한다.최순실과 그의 하수인들의 국정농단과 탐욕과 비리, 대통령의 어이없는 행태로 국민들이 절망과 분노에 빠져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하야’를 외치던 때에 한편의 작은 다큐멘터리가 다른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목소리가 커서도, 외
‘순실의 시대’라고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 빗댄 말이다.최순실과 그의 가족의 명령과 부탁에 따라 대통령이 재벌 총수를 만나 직접 앵벌이까지 하고, 그 하수인들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온갖 심부름을 다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순실의 시대’, 그런 인간들에게 나라를 맡긴 국민들에게는 분명 ‘상실의 시대’이다. 그 자괴감과 허탈감, 분노로 국민들은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든다. 청와대를 향해 “내려오라”고, “다 잡아넣어” 하고 소리친다.그래도 그들은
“대신들이 위세를 얻고, 좌우 측근들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면 군주가 힘을 잃은 것이며, 군주가 힘을 잃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 있는 자는 1000명 가운데 한사람도 없다.”법치로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중국 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의 말이다. 왕과 측근, 그리고 그들 주변에서 기생하는 무리들의 부패와 타락이 나라를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한 그는 ‘망징(亡徵·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후)’ 47가지를 열거했다. 그 중 한두개만 있어도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한비자(韓非子)가 말하는 ‘망징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떤 해석이나 설명, 비평도 ‘팩트’ 자체를 능가할 수 없다. 누구는 그랬다. “누가 소설과 영화를 읽고 보겠느냐”고. 동의한다. 그 어떤 드라마도, 영화도 시들하다.이번만큼은 ‘문화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화와 소설을 만난다’고 해야 맞다. 영화나 소설의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대통령에게서. 드라마도 아닌 뉴스를, 저녁 8시에 시작하는 JTBC의 ‘뉴스룸’ 보려고 매일 기다리는 일도, 그 뉴스에서 대통령
정치는 영화와 비슷하다. 연기와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착각과 환상을 심어준다.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천국으로 변할 것만 같다. 모든 후보자가 당선만 되면, 자리에 앉기만 하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처럼 말한다.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온갖 장밋빛 약속으로 국민을 유혹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정권을 시작하면 국민 모두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 받는 세상이 온다. 청년실업도,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우리사회의 높은 계층의 벽도, 극심한 빈부격차도 사라진다
‘신신신야 의의역신야(信信信也 疑疑亦信也)’순자(荀子)의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나오는 말이다.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이 신(믿음)이며, 의심할만한 것을 의심하는 것 또한 신(믿음)’이라는 얘기다. 순자는 ‘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파했다. ‘말을 해서 마땅한 것이 지(知)이며, 침묵해서 합당한 것이 또한 지(知)이다’라고.믿음만 놓고 보자. 순자의 말은 믿을 만한 것은 믿어야 하지만, 반대로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것은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과 부정이 있다면 이를 마땅히 의심해 사실을 밝히고 바로 잡아야 믿음
과격파 운동권 출신인 이치로. 대담하고, 제멋대로이고, 누구도 겁내지 않는 40대 중년이다. 국가와 사회, 모든 체제와 제도를 부정한다. 아들에게 다니기 싫으면 학교도 그만두라 하고, 세금도 일절 내지 않는다.임순례 감독이 한국으로 무대를 바꿔 영화로 만든 일본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의 주인공이다. 그는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러 방문한 공무원을 ‘구청에서 온 장사꾼’ 취급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체제에 빌붙어 사는 개 따위와 말 섞을 마음은 없어. 나는 관청이 벌레보다 싫어. 국민세금의 떡고물로 연명하겠다는 그
1위 선수가 모두 우승을 하고, 금메달을 땄다면. 리우올림픽은 아무 재미와 감동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지구촌 모두의 축제이니, 화합의 마당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많은 선수들이 참가할 이유도, 사람들이 열렬히 응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으니까.스포츠만 그런가. 세상사가 다 그렇다. 1위가 언제 어디서나 1등을 독식하는 세상. 재미없다. 그런 곳에 사람들은 꿈도 꾸지 않고, 희망도 품지 않는다. 그런 곳은 변화도, 발전도 없는 ‘죽은 사회’다. 삶에는 때론‘기적’도 있고, 기적은 아니
10여년 후면 인천 영종도는 마카오가 된다. 인천국제공항 국제업무지역에 3개의 거대 카지노 복합리조트가 들어서니까. 물론 외국인 전용이다. 그 유혹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여도 우리 국민은 갈 수 없다.혹시 모르겠다. 지금은 ‘출입금지’로 못 박고 있지만,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어느 미친 정부가 ‘제한적’이란 있으나마나한 꼬리표를 붙이고 ‘허용’으로 바꿀지도. 싱가포르처럼 말이다.그게 아니라도, 대한민국에 ‘도박’할 곳은 널려있다. 강원도 정선에 가면 카지노가 있고, 가까운 곳에 경정과 경륜이 벌어지고, 스포츠 토토
50여년 전이니까, 벌써 옛날이야기다. 도시라고 가난이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는 먹을 것이 더 귀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마무리됐지만 여전히 보릿고개가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미국이 구호물자라고 보내준 요즘으로 말하면 가축사료인 강냉이가루와 우유가루를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점심을 굶는 게 예사인 시대였다.그래서 아이들은 하루 종일 들판과 야산, 논과 밭, 개울과 시내에서 살았다. 그곳에 ‘먹을 것’이 있었다. 아직은 어려서 포획에 서툴렀던 나는 형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것들을 얻어먹었
평균 수명이 나날이 늘어 내남없이 여든까지는 사는 게 여사인 고령화세상.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보면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까마득하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넉넉해 더 이상 ‘밥벌이’를 계속하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아직도 자식들이 학교 다니고, 졸업했는데 취직도 못하고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 구차함과 고단함과 지겨움이란.설령 모아놓은 돈이 많거나, 연금을 넉넉하게 받거나, 자식들이 푸짐하게 주는 용돈이 있어서 그냥 놀아도 된다고 하자. 그것만으로 여생이 편안하고 즐거운 ‘백세인생’이 된다면야 얼마나 좋으랴.
‘섬’은 고립과 단절, 배타와 폐쇄의 상징이다. 고립은 공간적이고, 단절은 심리적인 느낌을 갖는다. 배타는 자기집착과 피해의식에서 나오고, 폐쇄는 어둡고 독선적인 공동체 의식을 낳는다.소설과 영화는 그런 섬에서의 폭력과 광기를 이야기한다. 물론 그 폭력과 광기의 대상이 ‘성’인 경우가 많다. 이문열의 1980년대 단편 ‘익명의 섬’은 섬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내의 성적 이탈을 알면서도 마을 사람 모두가 공범인 양 그 가해자를 ‘익명’으로 묻어버림으로써 섬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그들에게는 공동체 의식과도 같은 그 질서의
‘소설의 힘일까. 번역의 힘일까.’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번역이 원작의 완성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의 ‘맨부커상’을 수상한 걸 두고 하는 얘기다.그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후보는 몰라도 수상작까지 된 것은 솔직히 좀 의외였다. 작품성을 과소평가해서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대중적 인기를 끌지도 못해서도, 소설이 나오고 2년 뒤에 선보인 영화가 인간심리에 대한 섬세함을 잃고 시각적 자극에 빠져 원작에 관심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 ‘로망’이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의 특권과도 같은 순수, 열정적인 사랑은 물론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인 우정, 나눔, 애국, 사명감, 평화까지. ‘로망’이 됐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나도 원하고 꿈꾸는 것이란 얘기이다.‘태양의 후예’의 성공을 두고 온갖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다. 벌써 아시아와 유럽까지 뜨겁게 달구며 32개국에 수출이 되자, ‘대장금’ 이후 최강의 ‘한류열풍’이라는 둥 난리법석이다.사실, 시작 전부터 어느 정도 성공은 보장이 된 드라마였다. 한류스타 송중기와 송혜교 주연, 제
아직 구성도 안 됐는데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아무리 정치를 혐오하고, 국회에 실망해 투표율이 낮아도 이미 ‘없는 것’은 결정됐다.혹시 유권자들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뜬자들의 도시’에서처럼 모두 백지투표를 해 선거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면 모를까. 그러나 이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에나 나오는 상상일 뿐. 그러니 20대 국회에 ‘문화’는 없다. 비례대표를 보면 결코 억지가 아니다.애초 20대 국회 비례대표는 그 모양새부터 찌그러졌다. 19대 국회 임기 말에 여야가 지루한 싸
박찬욱 감독의 2002년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제목처럼 복수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다. 누가 대신 해도 안 되며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복수가 서로 얽히고, 그것이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고, 결국에는 모두가 연쇄사슬처럼 끔찍한 종말로 치닫는다.여느 복수극과 달리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복수의 폭력성과 자기 파괴성을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정반대 정서인 건조한 시선과 침묵을 이어감으로써 인간 본성을 오히려 집요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모두에게 복수의 동기와 행위를 부여했고, 그것을 선악의 이
뉴케드(새로운 케이블 드라마)란 신조어를 낳고 유행시킨 ‘응답하라’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 끝난 지 두 달. 그 인기와 방영 간격(2012, 2013, 2015)으로 보아 네 번째 시리즈가 빠르면 내년이면 나올 것이다. ‘1997’이 처음이었고, 두 번째 시리즈가 ‘1994’, 세 번째가 ‘1988’로 세월을 조금씩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번에는 격동의 1980년을 향해 “응답하라”고 외치지 않을까. 추억과 복고의 ‘응답하라’ 인기몰이, 위안은 되지만…이 시리즈가 가진 재미와 감동은 새삼
모든 일에는 징후가 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려면 수백 번의 작은 사고가 앞서고, 심한 병을 앓기 전에 신체에 작은 이상들이 나타나듯이.때론 영화의 상상이, 아니면 과거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현실의 징후를 일려주기도 한다. 하필이면 왜 지금 이 이야기를 영화가 하는 걸까. 그 상상과 재조명이 지금 아니면, 곧 다가올 미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기 때문일까. 미국 경제붕괴 부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다뤄···우리 현실은?지난달 국내에서도 개봉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영화 ‘빅 쇼트’
영화 ‘레버넌트’는 처절하다. 영화가 그리는 한 남자의 복수가 그렇고, 그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그렇다. 북미의 혹독한 겨울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맨몸으로, 자연 그대로 부딪쳤다. 얼음 강에 뛰어들고, 말의 시체 속에 알몸으로 들어가고, 살아있는 물고기를 먹었다.그도 어느새 40대 중년이다. 열 아홉의 어린 나이에 ‘길버트 그레이프’(1993년)로 세계 영화팬들을 놀라게 하면서 단번에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늘 소년 같은 이미지를 간직하던 이 천재 배우의 얼굴에도 이제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했다.할리우드에 연기를
무명가수 이애란의 노래 ‘백세인생’이 인기다. 20년 전에 전혀 다른 제목(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으로 나와 묻혀버린 노래,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도 중년이 되어버린 지난해 말, 한 네티즌의 짤방(영상을 짧게 편집한 동영상이나 사진)이 노래와 가수를 세상에 퍼지게 했다. 더 정확히는 노랫말 중 한 단어 ‘전해라’의 패러디 열풍이다. ‘회식? 못 간다고 전해라’, ‘과제? 재촉 말라고 전해라’, ‘음식? 맛있다고 전해라’처럼.지금 분위기로는 ‘전해라’ 열풍이 꽤 오래갈 것 같다. 4월 총선 거리 유세에서도 이 ‘전해라’란 노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