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한중수교가 이뤄졌던 1990년대 초, 나는 베이징 지사의 주재원으로 북한 사업을 겸하고 있었다. 사업이 사업인 만큼 북한에서 출장 나온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역시 동양 문화권에서는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속에 있는 말도 하고 소위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인지라 술집에서 함께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즈음 중국에서도 가라오케가 대 유행이어서 식당이나 술집 할 것 없이 녹음 반주에 맞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중국 노래는 물론 웬만한 남한과 북한의 노래가 망라되어 있었는
필자가 우리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 땅을 처음 가본 것은 1985년 1월이었다. 당시 입사 3년차로서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타이베이와 홍콩, 일본이 목적지였다. 제주 상공을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고도를 서서히 낮추기 시작했을 때인데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화창한 날씨 아래 잘 정돈된 논 사이로 오토바이 한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눈으로 그 뒤를 쫒던 기억이 생생하다. ‘홍콩 간다’는
“저는 지금까지 중국의 겉모습만 보았던 것 같아요. 중국은 역시 무서운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술자리에서 사소한 시비에 말려 공안국(경찰서)에 끌려갔던 한 한국인 사업가가 혀를 내 두르며 나에게 한 말이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컴컴한 골방에서, 들어서자마자 사람 취급은 고사하고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들더라는 것이다. 그들의 고압적인 자세와 분위기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고 그는 실토했다. 중국의 ‘다른 얼굴’에 놀라는 사례 많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무지의 소치“정말 대단해요
중국 동북쪽에 위치한 랴오닝성(遼寧省)의 지방 도시에 간 적이 있다. 상담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위해 그 지역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음식점에 들렀다. 중국의 음식점은 지방도시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작은 음식점이 아니다. 5, 6층짜리 건물 전체가 식당이고, 정원이나 실내 장식 등의 화려함은 웬만한 도시의 대규모 음식점에 뒤지지 않는다. 그 음식점도 정원에 인공 열대 식물과 괴석 등으로 멋을 부린, 규모가 작지 않은 음식점이었는데 입구부터 사람들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썰렁할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거래선 사장에게 물어보니 오늘 이
“포장마차가 아니라 기업이구나.”오랜 중국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내가, 친구와 함께 잠실역 근처 포장마차 촌에 들렀을 때 터뜨린 일성이다.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동네 어귀에 있는 포장마차는 돈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소주 한 잔에 꼼장어나 오뎅 국물 등으로 뱃속을 녹이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당시의 포장마차는 가게 얻을 돈이 없는 사람들이 리어카에 간단한 안주 거리를 싣고, 동네 어귀나 빈 터 외딴 곳에 덩그러니 손님을 기다리던 곳이었다.이러한 나의 포장마차에 대한 생각은 수많은 포장마차가 한 곳에 모여
친박과 비박, 친노와 친문 등 요즘 언론의 정치 난에는 소위 계파를 칭하는 말이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흩어지고 때로 뭉치면서 경우와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질긴 인연으로 정치판을 장악하고 있는 듯하다.사람이 살다 보면 소위 자기와 죽이 맞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뜻이 같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은 사람이다. 눈빛만 봐도 가슴 속의 생각을 읽어내고, 말하지 않아도 심중의 고민을 헤아린다. 따라서 이런 사람과 같이 있고 싶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런 사람과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코드인사라는 말이
요즘 언론에 비치는 여의도 정가는 어지럽다. 몇 년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현상에 기시감을 느끼면서 새삼 중국인들이 흔히 쓰는 ‘하이부즈따오’라는 말이 생각난다.2003년 초,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나에게도, 본사의 분식회계로 야기된 ‘SK 글로벌 사태’의 파장은 예외 없이 몰아쳐 왔다. 검찰의 발표와 이후의 진전 상황에 따라 회사와 직원들의 명운이 걸려있는 상황이어서 우리는 매 시간마다 피 말리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현장에만 있었던 우리로서는, 언론을 통해
남중국해에서, 그리고 한반도에서 세계 1위 미국과 세계 2위 중국의 신경전이 예사롭지 않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도발에 중국은 한 치 물러섬 없이 맞받아치고 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암중모색이 치열하다. 일본과 중국, 세계 질서를 보는 눈 전혀 달라언젠가 세계 2위 일본과 세계 2위 중국의 행보를 비교한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일본 언론인의 말을 빌려 ‘두 나라는 세계 질서를 보는 눈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1968년 세계 2위 자리
‘우리가 중국을 너무 얕보았다.’중국 진출 초기, 한국에서 패션사업을 하면서 중국 다리엔(大連)에 몇 개의 패션 매장을 열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어느 지인의 얘기이다.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가 중국에 진출한 주된 목적은 한국에서 한물간 재고품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보다 유행이나 감각에 한 수 뒤떨어진다고 판단한 그는 한국에서의 재고를 중국 매장에 옮겨 팔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는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게 됐다. 한국 기업, 한때는 중국을 ‘떨이 시장’으로 생각해
[오피니언타임스=함기수] 바야흐로 세계가 한 마을처럼 된다는 지구촌(Global Village)시대다. 우리나라도 이제 상주 외국인이 150만명을 넘어 전체 인구의 3%에 이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제 한겨레, 단일민족의 개념은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각국의 사회과학자들이 2010~2014년에 한국인 1200명을 포함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행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한국인의 34%는 다른 인종과 이웃이 되는 것에 부정적이라고 답했고, 44%는 이주노동자와
제갈량의 적벽대전 연상케 하는 중국의 외자 유치 전략[오피니언타임스] 안개 낀 새벽, 20척의 배를 향해서 조조군은 빗발처럼 화살을 쏟아 붓는다. 서기 208년, 천하 쟁패를 위해 조조의 대군과 유비, 손권 연합군이 결사적으로 맞붙었던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의 일이다. 무자비한 화살 공격을 받은 배들은 그 화살들을 싣고 유유히 돌아오고, 짚과 허수아비로 위장하여 모자라는 화살을 보충하기 위한 제갈량의 지략은 이렇게 성공하게 된다. 제갈량은 앉아서 10만개의 화살을 얻은 것이다.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그들이 외자 유치를 통해서 그들의 목표
[오피니언타임스]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난히 돈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재(理財)에 밝고 돈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람들을 얘기할 때 장사 수완이 뛰어나고 돈을 밝힌다고 하는데 나의 경험으로도 지나치게 과장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어느 초라한 할머니가 손을 떨며 베팅하던 모습은 아직도 나에게는 충격으로 남아 있다. 증권 거래소가 개설되고 주식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이 돈 냄새 나는 곳을 지나칠 중국 사람들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증권회사 객장에는 사람들로 넘
[오피니언타임스]주변에서 중국 증시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중국 경제가 이렇게 발전하니 안전한 종목에 투자해 묻어 놓고 있으면 나중에 효자 노릇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주식 시장이 그 나라 경제를 반영하는 거울임을 감안할 때 일리 있는 얘기이다. 그러나 중국주식 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여기에는 자본의 개방이라는 대세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딜레마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고뇌가 고스란히 섞여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중국 본토의 증권시장은 상하이와 선전에 있다. 상하이 증권거래소가 1990년12월19일 첫 거래
[오피니언타임스]랑랑(郞朗)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다. 1982년 랴오닝성(遼寧省) 션양(沈陽) 출생으로 2011년 초 후진타오의 미국 방문 시 백악관 국빈 만찬장에서 반미(反美) 성향의 곡을 연주해 언론의 주목받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는 만찬 직전 언론인터뷰에서 “중국인들은 자부심이 강하며 이 노래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연주할 곡으로 직접 골랐다”고 밝혔다. 연주 후 자신의 블로그에는 “수많은 외국인 앞에서 중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연주할 수 있어 행복했다”는
[오피니언타임스=함기수]‘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마을에 전염병까지 돌아 아버지가 죽고 맏형과 여러 형제들이 연이어 사망했다. 둘째 형수와 셋째 형수,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 진씨마저 사망했다. 혈혈 단신 고아가 된 그는 하루 한 끼도 먹기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승려가 되기로 하고 출가했지만 절이라고 끼니가 충분할 리 없었다. 두 달 만에 그는 탁발승이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사실상 비렁뱅이 생활을 하게 된다.’이는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명(明)을 건국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1328~1398)의 유년 시절 이
[오피니언타임스] 실제 생활과 동떨어진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배격하고 현실에 입각하여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이는 후한서(後漢書) 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實事求是)’ 즉,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고,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 낸다’ 에서 비롯된 말이다. 청(淸)나라 초기에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오직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학자들이 내세운 이론이다.그 어원이나 실
[오피니언타임스] 최근 메르스의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다. 환자가 입원했었거나 거쳐 간 병원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외부와 일체 차단되는 격리조치가 단행되었다. 한산해진 거리와 마스크를 쓴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중국에서 겪었던 사스(SARS)의 공포가 떠오른다.일부 언론에서는 메르스에 대한 한국의 늦장대응을 질타하면서 중국의 재빠른 대처를 기사화했다. 한국에서 메르스가 급속히 확산되자 중국 당국은 ‘사스의 영웅’ 중난산(鐘南山) 공정원 원사를 수장으로 한 ‘메르스 통제를 위한 전문가조’를 출범시켰다고
[오피니언타임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 캐나다는 오늘날 세계 경제의 방향과 정책 등을 좌지우지하는 8개 나라, 소위 G8 국가들이다. 이들 중 캐나다를 제외한 7개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100여년 전 베이징에서 중국을 처절하게 짓밟았던 8개 나라, 소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 8개 연합국이다.수많은 민란과 혁명으로 점철된 중국의 역사에서 의화단의 난은 가장 가슴 짠한 아쉬움을 남긴다. 이들은 몰락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조국을 유린하는 서구 제국주의에 맨주먹으로 대항한 순수 민간인들의 항쟁이었기 때문
[오피니언타임스 함기수 중국이야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역사적 인물은 제한적이다. 공자나 맹자, 진시황, 유방과 항우, 유비와 제갈량 등이 우리에게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보면 광대한 대륙에서 수없이 명멸한 왕조들과 함께, 그 시대를 폭풍같이 살아온 수많은 영웅, 호걸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중국 사람들이 지금도 가장 추앙하는 사람은 악비(岳飛)다. 악비(1103~1141)는 남송(南宋)의 명장으로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 탕인(湯陰) 출생(出生)이다
[오피니언타임스 함기수 중국이야기]어느 유명한 프로 바둑 기사는 다음 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 기록계에게 기보를 받아 거꾸로 들고 본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둑판을 들여다 보기 위함이다.입장의 전환,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맹자(孟子)’ 이루(離婁)편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하는 말이다.맹자가,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 그리고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칭송하면서 ‘이들은 입장이나 처지가 바뀌어도 그렇게 할 사람들(禹稷顔子易地則皆然:우직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