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시간은 소중했다. 첫 애인과의 첫 다툼도 시간 때문이었다. 픽사의 명작 '월-E'를 보기로 한 날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 애인이 연락두절이었다. 영화 시작시간 5분 전에야 방금 일어났다며 문자가 왔고, 나는 그냥 혼자 영화를 봤다. 지금 같으면 카페나 서점에서 상대를 기다렸다가 제대로 사과를 받고 감정을 풀었겠지만, 10년 전의 난 그런 처신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내 시간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그토록 소중했던 나의 시간은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내가 돈맛을 알기 시작한 것은 5~6세 때로 기억한다. 내 기억으로는 항상 설날은 추석보다 수입이 짭짤했다. 그런 내가 올해로 38세가 되었다. 항상 외국 나이로 생각해서 30대 중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40에 가까워지다니.2019년도 어김없이 설날은 찾아왔다. 이번 설날에는 누가 뜬금없이 나에게 세뱃돈을 내밀었다. 40줄에 든 나에게. 나도 한동안은 어리둥절했다. 이거 뭐지? 옆에 있는 조카한테 대신 전해주라는 건가?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말이 없었다. 나에게 주는 돈이 확실했다. 이거야
[오피니언타임스=하늘은] 질적 연구란 자료의 양보다는 질로 승부하려는 연구방법이다. 그래서 통계를 통한 계량화를 지양하고 현장에 직접 들어가 관찰하고 심층면담하고 문헌을 연구한다. 박사논문을 포기한 지 오래지만 나름 질적 연구자랍시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직접 체험해보고 대화를 통해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30대 초입에 대기업을 퇴사하면서 나 같은 또라이가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대기업 청년퇴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얼마 전 우연히 검색하다가 이미 질적 연구로 잘 정리된 논문(『대기업 청년 퇴사자의 진정성과 자기계발』
[오피니언타임스=서은송] 불과 스무 두어살을 먹은 내게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고민을 상담해달라며 연락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열에 아홉은 모두 소재만 다른 자신의 연애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있었을 어느 스무 두어살의 연애를 기억하는가.대부분 2년 정도 사귄 친구들은 모두들 ‘권태기’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권태기는 20여년을 다르게 살아온 사람 둘이 만나, 언제부터 어색해졌는지도 모른 채 점점 멀어져가는 무언의 감정을 뜻하기도 한다. 그저 성격이 조금 달랐을 뿐이고, 누군가는 말이 조금 많고 누군가는 말이 조금
[오피니언타임스=신영준] 영화 ‘극한직업’이 개봉 17일 만에 1100만명을 돌파했다. 물론 작품성과 코미디 영화의 부활이라는 측면으로서 가치도 크지만 개인적으로 더 열렬히 시청한 이유가 있다. 본업은 아마추어 작가라고 주장하는 나는 사실 자영업자다. 칼럼을 연재하고 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거의 모든 수입은 운영 중인 치킨 집에서 나온다.“소상공인들, 다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이야!”최후의 격투 장면에서 찡하고 짠한 명대사가 터졌다. 극중 마약반 고반장(류승룡)이 경찰이든 위장한 통닭집 사장이든 목숨을 걸고 한다며 언급한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15년 전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나서 명절에는 어떻게든 부산행 열차표를 구했다. 인터넷 예매가 실패한 날이면 4호선 첫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현장 잔여석을 구매한 적도 있다. 비록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처량한 뒷모습이나마 아침 뉴스 참고화면으로 실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런 열차 신봉자가 올해는 호기롭게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겠노라 선언했다.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하고 대기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차로 운전해도 열차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이 섰다. 편도 380km의 거리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드라마 sky캐슬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붙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한 쪽에서는 ‘거 봐라, 학종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그러니까 학종 코디가 필요하다.’며 코디 신규 수요를 창출했다. 전자는 후자에게 ‘드라마를 보고도 정신 못 차렸느냐.’며 비판한다. 후자는 억울하다. 후자는 살아남고자 했을 뿐이다. 사람마다 사교육의 침투범위가 다를 수 있다. 드라마가 전파한 것은 사교육의 허용 경계선이다.입시 병폐를 폭로한다는 주제 의식 안에서, 내가 원했던 혜나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이 죽음
[오피니언타임스=최미주] 학원에서 겨울 캠프를 갔습니다. 겁이 많아 놀이기구를 잘 타지 못하고 물놀이도 즐기지 못하지만 아이들이 좋아 따라간다 약속했습니다. 하루는 종일 놀이기구 탄 후 삼겹살 파티. 다음날은 집 갈 때까지 워터파크에서 놀기. 이 모든 걸 소화하기 위해선 상당한 체력과 책임감, 용기가 필요했습니다.자이로드롭 앞에서 도망가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개그라도 보듯 웃어댔습니다. 한 번만 같이 타면 안 되냐 졸라댔으나 자신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어렸어도 눈 찔끔 감고 도전했을 법한데 어느 순간 점점 더 겁쟁이가 되어가는 자신을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작년 추석에 하버드 나오신 S대 교수님의 라는 칼럼이 유행했다. 이 분의 글쓰기 강의에는 몇 백 명이나 몰려오고 무려 이 칼럼을 필사까지 하는 분까지 있다고 한다. 주류와는 전혀 동떨어진 삼류 프리랜서 작가인 나는 솔직히 0.0001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무려 세 명의 한국인 친구로부터 읽어보라고 카톡이 오는 바람에 읽어야 했다.첫 번째 추천에는 “고마워”로 대충 대답했지만 두 번째 추천에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래도 “그래.”로, 밥 먹는데 도착한 세 번째 추천에는 정말 제대로 욱해서,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진지충.분위기에 안 맞게 매사에 너무 진지한 태도나 표정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을 비하하거나 약간의 유머를 섞어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충(蟲)’을 갖다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진지충’은 아무리 웃으면서 말해도 결과적으로는 공격적인 ‘멸칭’의 성격을 갖는다.진지한 벌레라니. 진지함이 죄가 된 시대다.이왕이면 즐거우면 좋다는 것, 동의한다. 즐거움이 미덕이 되었다. ‘펀셉트’라는 신조어가 회자되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재미(fun)에 콘셉트(concept)가 더해진 말이다. 얼마나 재미
[오피니언타임스=하늘은] 한 아이가 마스크를 건넨다. “아저씨, 요즘에는 공기가 매우 나쁘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고 나는 마스크를 부여잡고 한참을 생각했다.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내 몸을 생각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밥이나 제때 챙겨먹으면 다행이다.마스크를 쓰고 다음 배달 장소로 이동한다. 강남의 한 아파트인데 가는 길이 막힌다. 어제는 길을 잘못 들어 2시간이나 허비했다. 초보 택배기사들이 종종 하는 실수라고 하는데 나는 앞으로도 방향을 자주 잃을 것 같다. 내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한국에서 1월 초에 개봉한 영화가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었던 러시아 영화 다. 영화는 흑백인 데다, 러시아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 관객을 몰이하는 요소는 적다. 덕분에 관객은 많지 않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자아내는 느낌이 좋았다.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하는 단어인 ‘레토(Лето)’는 극중 인물이 부르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80년대말 소련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키노(Кино)의 보컬이자 고려인으로도 유명한 빅토르 초이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 혹자는 ‘자본
[오피니언타임스=김우성] 외국인 교수님이 진행하는 영어 강의를 들은 적 있다. 하루는 교수님이 나에게 말했다.“한국 학생들은 왜 그래? 수업시간에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보다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더라고. 얻어가는 게 거의 없더라도 A+만 받으면 만족하나봐?”교수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수강신청하기 전 해당 수업 강의평을 늘 확인한다. 아무래도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지 여부다. 관심 있고 배울 내용이 많은 수업이더라도 A+를 받기 어렵다면 망설여지는 게 사
[오피니언타임스=이하연] 지난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생애 첫 회사를 그만뒀다. 3개월의 수습기간만 채웠으므로 퇴사라고 말하기 애매하긴 하나, 어쨌거나 정규직 채용 조건으로 들어간 회사였다. 운 좋게 입사 한 달 만에 정직원 제안도 받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사직서를 썼다. 퇴직 사유란에 “인턴기간 계약만료 및 이직”이라 적었다. 퇴사는 퇴사였다.고작 3개월이었다. 대단한 일을 하지도, 배우지도 않았다. 직장인의 삶을 아주 살짝 맛보았을 뿐이다. 월화수목금 아침 일찍 출근하고 8시간의 노동과 1시간의 점심을 보낸 후 늦은 저녁에
[오피니언타임스=김연수] 영어는 왜 항상 어려울까. 영어 공부를 해온 1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내 영어 실력은 애매한 수준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오래 공부했기에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더 민망한 것 같다. 외국어를 완벽한 수준으로 잘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영어를 읽고 쓰는 것보다 듣고 말하기에 더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치른 모든 시험은 독해 또는 영작 형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년계획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어 회화 부분을 공략해보기로 했다.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첫 번째로 미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체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보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대부분 체벌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매를 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이유든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피식 웃으며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그렇지 키우다보면 마음대로 안 될 거라고 했다.아이는 이제 6살이 됐고 고백하자면 나는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몇 번 아이를 때린 적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습작생들에게 등단만큼 간절한 소망이 또 있을까. 내 이름과 작품이 신문에, 문예지에 실리는 경험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등단제도에 균열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등단을 거부하는 작가들이 나타나고 있다. 문단 내 성폭력, 표절논란, 문단 권력 등 문단 내부의 문제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등단을 거치지 않고도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기존 한국문학에 피로감을 느끼던 독자들의 호응 또한 그들의 존재에 힘을 보태고 있다. 등단제도의 균열독자들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전년도 동기간과 비교한 매출 실적이 가득한 파워포인트, 복잡한 수식으로 구성된 엑셀 파일, 본 자료보다 수 배나 더 많은 양의 첨부자료가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마술사에 가까운 능력이다. 팀 내에서 누구보다 발표력과 기획력이 뛰어난 B.대학에서 두 개의 전공을 만점에 가깝게 이수하고, 회사에 들어와 앞만 보며 달리며 눈부신 능력을 보여준 그녀.한데 그녀가 지금 업무에 온전히 집중을 못하고 있다.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B의 트렌치코트 옷자락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네 살배기 딸아이의 손.가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매일 아침 7시, 사당역 10번 출구 앞은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서늘한 입김으로 가득하다. 피곤한 몸을 버스에 싣고 두 시간 가량을 좁은 의자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이다. 가끔 운이 좋아 옆자리가 빌 때도 있지만 보통은 빈자리 없이 빽빽하게 앉아서 간다. 세상 혼자 사는 쩍벌남이 옆에 앉기라도 하는 날에는 몸이 닿는 불쾌한 느낌에 선잠도 들지 못한다.통근버스로 출퇴근한다는 말에 천진한 친구들은 달달한 로맨스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기도 한다. 아마 종착지가 스키장이나 놀이공원이 아니라 사무실이라는 사실을 간과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작년에 퇴직을 하려고 했는데 끝내 못하고 장기휴가를 받았다. 크게 불만이 없는 직장이었다. 나는 한국인이 이민가고 싶어 하는 나라 5위권 안에 드는 뉴질랜드 주민이었고, 웬만해선 잘리지 않는 뉴질랜드 정부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갑 중의 갑인 국세청 소속이었다. 일도 나쁘지 않았다. 어카운트메니저라고 회계법인 대표들 찾아가서 차나 마시며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거나 회사 대표들 앉혀놓고 세금교육 시키는 일이었다.회사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처음에는 어, 얘는 왜 이렇게 생겼지? 중국인 아냐? 하는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