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지 80여일 지난 시점에서 질문을 던져 본다. 이 정권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외부와 내부 중 어디일까? 물론 내부 역량과 외부 여건 둘 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문(愚問)이다. 그럼에도 진짜 문제는 자유한국당 등 개혁에 저항하는 외부 세력이 아니라 내부 역량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들고 있다.얼마 전 자신을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이라고 밝힌 한 누리꾼이 “이제 문재인 정권도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모양”이란 다소 과격한 제목의 글을 SNS 대화방에 올렸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필자의 중요 일과 가운데 하나가 산책이다. 매일 만 보 이상 걷는다는 원칙이 벌써 여러 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길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개미들의 생태다. 지난 5월 어느 날 저녁 나는 휴대폰에 이런 메모를 남겨 놓았다. “개미의 사회생활을 갖고 글 하나 써 볼 만하다. 이 어두운 시간 가로등 아래서 보니 개미떼가 새까맣게 모여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자전거 바퀴에 짓밟힐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볼 용기와 끈기가 없어 그냥 갈
도법 스님이 몇 해 전 “전에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했다. 지금은 종교 때문에 국민이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종교가 연루된 갖가지 잡음·추문들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조계종 화쟁(和諍)위원장 자격으로 한 말이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정권교체가 되었다. 지인들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같이 하며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젠 정치 걱정은 그만해도 되겠어”, “앞으론 내 일이나 신경 쓰며 살아야지.”그러면서 기억난 것이 도법의 말이었다. 당시 필자는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지금은 세
“대선 전야에 한국 보수의 앞날을 걱정한다.” 이 칼럼의 주제다. 처음에 솔직히 털어놓을 게 있다. 이 주제가 궁여지책이란 점이다. 마감일 때문이다. 마감일이 다른 날이었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제로 칼럼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 지정한 마감일은 대선 전날인 8일이다. 칼럼은 대선일 오전 온라인에 뜬다. 그리고 한나절 뒤면 결과가 나온다.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에 따라 앞당겨 치러지는 대선일에, 선거와 상관없는 독창적 칼럼을 써낼 재주는 나한테 없다. 해서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앞서 말한 보수에 대한 걱정이다.
혁명일까 아닐까.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집회 말이다. 많은 기사나 칼럼들이 ‘촛불혁명’이란 표현을 썼는데, 맞는 걸까? 엄밀히 말해 촛불은 사전적 개념의 혁명이 아니다. 혁명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항용 혁명에 수반되는 유혈사태도 없었다.그럼에도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종의 은유다. 옛것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고 싶은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역사적으론 피를 흘리지 않은 영국 명예혁명도 있었다. 또 중요한 한 가지, 그것이 이룬 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하며 산다. 이때 필요한 것이 근거(또는 이유) 제시다. 예를 들자. “대한민국 최고 미남은 장동건이다.” 뜬금없이 이 말만 하는 것은 그냥 취향 고백이다. 이것이 주장이 되려면 근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미남의 기준은 이러저러하다는 생각을 밝히고, 장동건이 거기에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나오는 말이다. 책은 “주장은 반드시 논증하라”고 말한다.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억지소리나 궤변으로 들린다.논증이란 관점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을 보려 한다
루마니아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귀에 쏙 들어왔다. 나라밖 뉴스가 평소보다 각별하게 들린 건 감정이입 탓 같다. 시민 수십만 명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한국에서 목하 진행 중인 촛불집회와 겹쳐보였다. 시위의 발단은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부패사범 사면에 관한 행정명령이었다. 시민들은 그 철회를 요구했다. 시위가 연일 이어지자 정부는 굴복해 행정명령을 폐지키로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내각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이번 시위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을 귄좌에서 몰아
‘예쁜 대통령’이란 표현은 왠지 어색하다.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왜냐하면 대통령 앞에는 예쁘다가 아니라 결단력, 통찰력, 포용력, 리더십 같은 수식어가 제격이기 때문이다.지난해 3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어떤 목사가 이런 설교를 했다. “다른 나라 여성 정치인들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지만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의 미와 모성애적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신다.” 그는 “(대통령의 몸매가) 완전 차별화 되셨다”는 말도 했다.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대통령의 외모’, 정확히는 외모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 역할을 한
연일 타오르는 촛불은 언제쯤 꺼질까. 요즘 자주 쓰이는 ‘지속가능성’ 개념을 촛불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만큼 촛불이 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진행 중인 탄핵과 후속 정국에 있어 사활적인 요소다. 이 문제를 살피려면 촛불을 과소평가하고 폄하하는 발언들이 타당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작가 이문열은 ‘보수여 죽어라…’란 조선일보 칼럼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 중)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현재 심기는 어떤 것일까. 며칠 전 한광옥 비서실장이 “상당히 침울한 상태”라고 전했지만, 그건 그 나름 ‘심기 경호’ 차원의 얘기였으리라. 그 전에 읽은 한 칼럼은 박 대통령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다는 원로 정치인의 말을 빌려 이런 관측을 내놓았다. “국민 앞에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냥 있지 않을 거다. 골방에 들어가 혼자 울면서 보복을 다짐하고 있을 거다.” 그 뒤로 진행된 일들을 보면 이 원로 정치인이 상당히 잘 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일 국회의장을 전격 방문해 “여
거리를 걷다 보면 발길에 차이는 게 ‘일수 명함’이다. ‘급전 대출’을 권유하는 명함 형태의 대부업 광고다. 이 명함들을 보며 떠오르는 노래가 있으니 현인이 부른 ‘서울야곡’(1948)이다. 옛사랑을 추억하는 이 노래에서 충무로, 보신각, 명동 거리 풍경은 정겹고 낭만적이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로 시작하는 노래 3절엔 이런 가사도 나온다.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그러나 지금 거리에 그런 낭만이라곤 없다. 대신 우리를 맞는 것은 흩어진 일수 명함들이다.
‘과거 있는 여자’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오나.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쓴 소설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1951)’은 이런 여자 2명의 이야기다.마약 중독에 창녀의 과거가 있는 흑인 여성 낸시는 미국 남부 가정의 유모가 된다. 그를 고용한 백인 여성 템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역시 과거 창녀로서 겪었던 끔찍한 환영을 못 벗어나고 있다. 어느 날 낸시는 템플의 갓난아기 딸을 질식사시키는 범죄를 저질러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 살인은 템플이 과거의 고통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일종의 대속(代贖)적 행위
그러니까 정확히 이십년 전, 필자가 모스크바 특파원을 하고 있을 때다. 그해 9월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에게서 한국 특파원들과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식당에서 이 그룹이 당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벌이고 있는 가스전 개발 사업이 크게 진척되고 있다는 등의 설명을 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정 총회장이 선물이라며 비닐로 된 ‘빠껫(꾸러미)’을 내밀었다. 특파원단 간사를 맡고 있던 필자가 받았다. 자리가 파한 뒤 ‘빠껫’을 열어보고 놀랐다. 선물이란 게 돈 봉투였는데, 한 명당 3000달러씩이었
산책은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나는 혼자 걷는 이 땅의 남자들을 변호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철학자 칸트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팔십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산책에 나서 이웃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단조로운 삶이었지만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종합한 웅대한 사유의 비판철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데는 산책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가령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저 유명
서울의 세종로는 너비 10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다. 지금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건설할 때 너비 58자(尺) 규모로 뚫은 대로로서, 정부 관서인 6조와 한성부 등 주요 관아가 길 양쪽에 있다 하여 ‘육조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길이는 600m로 짧지만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상징하는 중심도로다. 마땅히 여느 곳보다 중요한 도로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그런데 이 도로에 문제가 많다. 2주 전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주변 세종대로(2014년 시행된 새 도로명)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
김광석의 노래에 ‘먼지가 되어’(1976, 송문상 작사, 이대헌 작곡)란 곡이 있다. 그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라고 노래한다. 사랑의 마음을 감정이입한 대상이 달도 새도 아닌 먼지다. 먼지가 되어서라도 당신 곁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거다. 참 절절한 사랑 노래다. 특이하게 김광석이 부른 ‘사랑했지만’이란 노래에도 먼지가 등장한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그러나 요즘 같으면 먼지를 갖고 이런 낭만적 감정이입을 한다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다. 먼지가 공포의 물질이 됐기 때문이다. 이
‘이쪽도 틀렸고 저쪽도 틀렸다’는 양비론(兩非論)은 기자들에게 친숙한 존재다. 논설위원을 오래 지낸 필자도 사설이나 칼럼을 쓰며 양비론의 유혹을 느낀 적이 많았다. 가령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서 누가 옳은지 판단이 쉽지 않을 때, 제일 편한 논리가 양비론이다. 양쪽을 준엄하게 꾸짖는 거다. 그래놓고는 양쪽에게 ‘시급하게 대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하는 식으로 끝낸다. 그러면 객관적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비론만 펴면 만사가 다 오케이인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어떤 주의·주장의 시비를 집요하게 따지고 고민해야 할 때도 있
테러방지법안이 논란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은 새로 나온 게 아니다.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1월 국가정보원 주도로 법안이 최초 제출되었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부결된 전력이 있다. 국정원으로서는 15년 숙원사업이 이번에 성취된 셈이다. 미국은 9·11 테러 후 만든 패트리엇법 폐기··· 더 안전해지지도 않아이 법이 재논의된 계기는 지난해 11월 13일 발생한 파리 테러였다. 12월 8일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기본적인 법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