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정리를 하다 벽장 속에서 빛바랜 노트 뭉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시절 쓴 일기장이었다. 엄마는 참으로 꼼꼼한 분이었다. 유년의 기록들을 쉬이 버리지 못하고, 내가 나중에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모아둔 것이다. 요즘 아이들도 학교에 일기를 써 가는지 모르겠다. 나 때는 반 아이들 모두가 일기를 썼다. 일기장 페이지마다 담임선생님이 찍어준 도장이 남아있었다.또박또박 큼직한 글씨체에 담긴 사연을 읽고 있자니 어린 내가 눈앞에 서있었다. 나는 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잃은 것도 있었다. 바람에 개미가 날아갈까 걱정하는
3~4년 전 TV 코미디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우리 언니, 지금 가실께요”라는 말이 한동안 화제였다. 그 코너에서 스타의 전속 스태프들이 외치던 “우리 언니 지금 가실께요”는 연예인병에 걸려 과한 대접에 익숙해진 진상 스타를 풍자하는 상징어였다. 코미디 속 ‘웃기는 유행어’ 정도로 여겼던 말투들은 이즈음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통용되고 있다.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가 끊기고 관객들이 항의하자 관계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상영을 도와드릴께요”였다. 영화가 빨리 상영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SNS를 통해 10년 전 알고 지내던 친구를 찾은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유년시절의 8할을 함께한 친구였다. 그 애는 내 생애 첫 이사와 전학에 나보다도 많이 울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막상 친구를 맺고 온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는 몇 달에 거쳐 서로를 기억하고 있음에 감동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소식을 주고받으며 애정 어린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그런데 차마 나는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겠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너무 다르게 변했을까봐, 혹은 현재의 내 모습에
문득, 보았다.목련, 개나리, 아카시아, 탱탱하게 부푼 나뭇잎들...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고 그래서 대낮인데도 하늘은 눅눅한 이불보다도 더 무겁게 내려 앉아 있던 날이었다.세상은 돌아선 연인들의 등처럼 캄캄했고 적요했고 텅 빈 듯했다.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날이었다. 가고 있는 시간도 오고 있는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홀로 서 있는 십 차선 횡단보도 앞처럼 그냥 어딘가에 붙박인 것 같던 날이었다.그때 보았다. 이미 만개한 세상! 30촉짜리 백열등 수만 개가 한꺼번에 점화되듯 꽃들이 피어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화제를 모았던 영화 에 나오는 대사다. 위정자들과 기업인들의 부정부패 뉴스보도를 연일 접하다 보면, “청렴?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라고 자조하게 된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자들의 파렴치한 독직과 부도덕에 ‘청렴’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듯하다. 비극이다.신문기사를 읽던 중 ‘청렴 생태계’라는 멋진 말을 우연히 접한 적이 있다. 법조인 출신인 성영훈 국민권익위원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청렴 생태계란
“대선 전야에 한국 보수의 앞날을 걱정한다.” 이 칼럼의 주제다. 처음에 솔직히 털어놓을 게 있다. 이 주제가 궁여지책이란 점이다. 마감일 때문이다. 마감일이 다른 날이었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제로 칼럼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 지정한 마감일은 대선 전날인 8일이다. 칼럼은 대선일 오전 온라인에 뜬다. 그리고 한나절 뒤면 결과가 나온다.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에 따라 앞당겨 치러지는 대선일에, 선거와 상관없는 독창적 칼럼을 써낼 재주는 나한테 없다. 해서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앞서 말한 보수에 대한 걱정이다.
어린이 날 전날, 아이와 아파트 놀이터에 갔다가 우연히 동네 초등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어린이 날 선물에 대한 얘기였는데, 아이들은 이번에 받을 선물이 무엇인지 보다 얼마짜리인지를 먼저 얘기하고 있었다. 어떤 선물인지 보다 선물의 가격이 중요해진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아무 생각 없는 듯 해맑게 괴성(?)을 지르며 놀이터를 누비는 내 아이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좀 씁쓸해졌다.‘휴거’라는 말이 있다.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인데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을 놀리며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도 근처 아파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청년비례 국회의원 경선후보자가 되었다. 운 좋게 후보자가 된 후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지금은 TV에서 만나야하는 수많은 정치인들을, 당시에는 국회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그들과 토론하는 자리도 주어졌다.그때 만난 정치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문재인이었다. 말을 썩 잘하진 못하지만 온화한 미소 속에 진정성을 볼 수 있었고, 매 순간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주력하기보다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운명(가교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하게 재생이 됩니다. 어느 날 오전, 조용한 방안에서 원고를 쓰던 중 문득 헛기침을 했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귀에 들린 기침소리는 바로 예전에 늘 듣던 그리운 아버지의 기침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아버지는 먼 길을 일부러 떠나지 않으시고 이 아들의 삶속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 엄마 잃은 아들이 얼마나 측은하고 가련했으면 이날까지 그대로 아들의 몸속에 머물러 계셨던 것일까요?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참으로 절박했던 그 시절로 훌쩍 돌
여섯 차례의 대선후보 TV토론이 끝났다. 토론이 끝날 때마다, 각 후보캠프는 물론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에서 득과 실을 따졌다. 실제로 TV토론으로 지지율이 놀라간 후보도 있고, 반대로 떨어진 후보도 있다. 그것이 투표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지만, TV토론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갈수록 정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우리나라 언론의 행태에서 TV토론은 그나마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선거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TV토론은 어떤 편집도 없이 여러 방송이 생중계하기 때문이다. 신
아직 이른 하늘, 다음 장을 넘는 악보처럼 어제의 잎이 지고 전신주를 지나는 바람이 찬찬히 현을 켠다. 차창에 닿는 새벽의 풍현(風絃). 흙먼지 묻은 승합차로 하나 둘 박자 타듯 오르는 노동의 발들.지하철역으로 들어서는 입구, 은박지 싼 밥덩이 한 줄씩 쥔 아낙은 손에 들린 것 맞닿아 치며 종이돈 부르는 타악(打樂)을 낸다. 열리지 않은 공원 그 앞 대리석 화단에 앉아 오는 밤잠 없는 노인들. 오래전 새끼가 맞춰 준 틀니, 높이 어긋난 불협을 달그락 달그락 무던히도 조율한다.이제는 허름한 빵집 영세의 네온만이 서너 개의 조명으로 거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4월9일(토요일) 11시 57분에 사퇴했다. 후보등록 30일 전까지 도지사직을 물러나야 한다는 공직선거법을 준수하는 과정에서 사퇴시한 3분전에 그만둔 것은 현미경적 법적용의 대표적인 사례이다.이 사건이 자신의 사퇴가 가져올 도지사 보궐선거를 차단할 목적이었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그의 사퇴를 예상하고 경남지사 출마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3분 안에 출마절차를 맞출 수 있었다면 5월9일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지자체장 보궐선거에 입후보 할 수 있었다.그러나 홍 후보의 교묘한 저지전략으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알겠나?(조교)”“네!!! 알겠습니다!!!(신병)”“근데... 북한 주민들은 우리의 동포 아닙니까?(신병2, 필자)”“아직까지 남·북은 전쟁 중이다! 38선 너머의 북한은 동포이기 이전에 적이라는 거 잊지 말길 바란다(조교)”21살이 되던 해, 군대에서 ‘주적’ 개념을 배웠다. 군대에서 ‘배웠다’는 뜻은 학습자의 자발성을 완전히 배제한 훈련(Training)을 말한다. 평소에 궁금증이 많았던 나는, 소대장을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이거 정신 나간 놈 아니야’였다.그리고 10년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낡은 운동화를 빱니다. 워낙 오래 신어서 열심히 빨아도 후줄근하지만, 세상을 함께 떠도는 도반이니 나름 정성을 다합니다. 여행자인 제게는 여정이 무사하길 바라는, 다시 떠날 수 있도록 떠난 자리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입니다.운동화를 빨다보면,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이상하리만치 신발만큼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어린 시절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지리 가난해서’ 멀쩡한 신발을 신었던
I.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신문은 독자에게 아첨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 독자들의 수준이 언론인보다 낮다고 지적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교만이요, 망발이니 당연히 피한다. 방송이 시청자를 태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형태에서든 독자를 비판하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부패정치인의 등장은 국민들이 투표권을 잘못 행사한 결과이며, 부실기업의 뉴스를 미리 탐지하여 발표하지 못한 것은 언론의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로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언론과 국민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여러 면에서 약진
다음달 9일에 치러질 제19대 대선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탄핵의 결과 실시하게 됐다는 점, 15명이나 되는 사상 최다 후보 등록을 기록했다는 점, 선거운동 기간이 전례 없이 짧다는 점 등이다.이번 대선 기간을 지켜보면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특징이 있다. 바로 TV토론에서 당연히 올라가야 할 당연한 주제, 즉 한반도 통일에 관한 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대선에선 외교·안보와 함께 통일 문제는 언제나 비중 있게 다뤄져 왔었다.그에 비하면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고려시대 창건된 여수 흥국사는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라는 국가 안녕의 염원을 담은 호국사찰이다. 창건 직후 젊은 학승이 백일기도의 회향축원문에 흥국기원(興國祈願)은 빠뜨리고 성불축원(成佛祝願)만 넣어 쫓겨났다는 일화도 전한다. 불교국가 고려가 왜구가 들끓던 남해안 지역에 지은 절이 꼭 종교적 목적만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이런 절이 조선시대에 오히려 호국사찰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이러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조선은 불교를 버리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왕조 초기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중차대한 행위로서 선거가 공정하고 자유롭게 치러지는가에 따라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각종 선거가 점점 더 공정하고 자유롭게 진행되어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해도 좋다고 본다. 특히 대통령선거는 주권자인 국민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해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중요한 행사다. 이때 투표는 개인적인 선택행위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니, 평생을 살아오면서 새벽은 죽은 공간이었다. 그저 육(肉)과 영(靈)이 세상과 단절되어 무의식을 탐닉했던 시간이랄까. 하지만 얼마 전부터 새벽 공기를 마시기 시작했다. 주변은 어둡지만 뿜어내는 공기만큼은 상쾌한 새벽은 생각 이상으로 매력적이었다.생각보다 많은 직장인들이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도로 위의 자동차도 쉴 새 없이 지나갔다. 나도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졌고, 남들보다 앞서나간다는 느낌도 덤으로 받았다.하지만 그렇게 5일을 보낸 뒤 주말을 맞이하여 새벽을 서랍 속에
데이비드 다오, 69세, 베트남계 내과의사. 열흘 전만 해도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지난 9일 시카고를 출발해 루이빌로 가려던 유나이티드항공 비행기에 탔다. 그러나 항공사측은 예약이 초과됐다며 다오에게 좌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그는 거부했고 보안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다오는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두 개나 빠졌으며 뇌진탕 증세까지 일으켰다. 다오는 승객이 아니라 마치 짐짝처럼 다뤄졌다. 한 여승객이 스마트폰으로 이 장면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