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 남아있는 바위글씨를 찾아서 탐방길에 올랐다. 남한산성에 널리 퍼져 있는 바위글씨를 찾아보니 지금은 거의 방치되고 있으나 이것들을 잘 연구하고 정리하면 훌륭한 문화재가 될 것 같다. 서양은 석조문화라 옛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는 목조문화라 대부분의 문화재가 사라지고 몇 개만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에 가면 반석(磐石)이라는 바위글씨가 행궁 뒷편에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누란(累亂)의 위기에 처하여 종묘사직과 나라를 반석과 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는 뜻을 오래 간직하기
한 달의 휴가를 받은 아들로부터 가족여행 제안을 받아 25박26일간 뉴질랜드 트레킹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자연(동물)생태 투어, 뉴질랜드 국립공원 트레킹, 공기 좋은 자연에서의 힐링이었다. 25박 26일의 여행일정25박 26일의 여행일정은 인천공항을 출발해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로토루아로 이동, 호수지역을 트레킹하고 로토루아 하무라나 스프링, 매 훈련장 체험, 마우리족 마을 탐방, 민속공연과 향토음식(항이) 등을 즐겼다.4일차에는 와이오타프 온천지대, 후카폭포
유럽의 역사는 광장의 역사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나 시내 중심부에 시청사와 성당 주변에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광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가 발전하였다. 광장은 문화 교류와 의식 행사, 군중 집회가 열리는 곳이자, 장터이며 모든 정보가 교환되는 소통의 장소이다.8월 초 북유럽의 발트 3국, 러시아와 핀란드를 여행했다. 공통점은 광장문화였다. 첫 번째 방문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리우스 구시가지, 구시청사 앞 광장. 새벽문을 들어서 개선문에 이어 국회의사당을 지나면 구시청사가 위치하는데 구시청사 앞 넓은 광장은 뒤
남해는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지금은 남해대교와 삼천포대교가 있어 육지와 연결되지만 다리가 없었던 시절에는 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남해 지형은 H자 모양인데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인 자모포자형(慈母抱子形,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남해대교를 건너면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는 남해 지형상 어머니의 머리에 해당하며 남쪽 가천 다랭이마을은 아랫도리에 속한다. 다랭이마을은 물이 풍부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계곡이 있는데 여성의 외음부에 해
팔당은 강의 양쪽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하여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堂)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팔당(八堂)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필자가 팔당호 물길을 따라서 여행하며 보고 느낀 명당터를 소개한다. 팔당의 남쪽 지역 분원리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속한다. 분원리는 조선왕실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으로 조선왕실의 자기를 공급한 데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자기를 만들려면 좋은 흙과 나무, 그리고 물류가 매우 중요했다.
태백은 백두대간의 중간 지점으로 매봉산에서 동쪽으로는 낙동지맥이 갈라지고 서쪽으로는 함백산, 태백산, 소백산 등 백두대간이 뻗어나간다. 남동쪽으로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와 남서쪽으로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가 있는 곳이다. 태백은 크고 밝다는 태백산에서 유래되었으며 신령한 산이라 하여 단군조선 이래 하늘에 제를 지내던 영적인 산이다. 태백은 석탄이 있어 우리 민족에게 불을 제공하여 주었고,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로 민족의 젖줄이 시작되는 곳이다. 삼수령 동쪽은 동해, 남동쪽은 낙동강, 남서쪽은 한강으로 흘러
어느새 입춘이 지나고 산악인들이 시산제를 지내는 때가 다가왔다. 산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나 기업인들도 해가 바뀌면 산에 올라 새해 소망이나 경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시산제를 드리기 좋은 장소로 지역마다 기가 센 곳을 찾게 되는데 서울 근교에서 기(氣)가 가장 센 곳으로는 강화도 마니산(472m)과 하남 검단산(657m)을 들고 싶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향하다가 속리산 천왕봉(1058m)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북금북정맥을 이루고 안성 칠장산(492m)에서 금
어느 도시를 가든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존재한다. 유럽 고대도시를 가 보아도 그렇고현대 도시를 가 보아도 국가 유공자를 모시는 국립묘지가 대부분 눈에 뛴다. 우리나라도 서울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고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장소 중의 하나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윤보선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 선영에, 최규하 대통령은 대전 현충원의 국가원수 묘역에 모셔졌다.무덤이란 인간이 이 땅에 살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훗날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며 그의
[오피니언타임스] 제주 성읍마을은 우리나라 8대 민속마을 중 하나이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아산 외암마을, 고성 왕곡마을, 순천 낙안읍성, 성주 한개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과 더불어 500년 이상 지속돼왔다. 성읍마을은 한라산(1947m) 동쪽지역으로 한라산에서 이어진 낮은 용맥들이 주변에 오름으로 솟았고 한라산 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인 천미천이 감싸주는 풍수적 명당에 위치한다. 마을 어느 곳에서나 우뚝 솟아 보이는 산이 영주산(瀛洲山, 320m)인데 성읍마을 사람들은 영주산을 신령한 산으로 생각한다. 영주산을 성읍마을에 생
[오피니언타임스]안동 하회(河回)마을은 조선시대 영남의 4대 길지였고, 오늘날에는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이곳은 미국 부시대통령 부자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기도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이곳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류성룡의 9대조 류난옥은 자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설만한 땅을 구하기 위하여 풍수사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터를 정하고 3대에 걸쳐 적선을 한 후 서애의 6대조 류종해 공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 후 600여년을 이어오면서
[오피니언타임스]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은 고려 말 조선건국에 반대해 은거한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이다. 양근 함씨의 입향조는 고려 말 두문동 72인(새로운 왕조 조선을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껴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들) 중 한사람인 함부열이다. 그의 형인 함부림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올랐지만 고려 말 예부상서와 홍문관 박사를 지낸 아우 함부열은 공양왕이 원주로 추방당하자 은밀히 뒤따라가 2년간을 모셨다. 그러다 왕이 다시 유배되자 간성으로 거처를 옮겨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손자인 함영근이 조선의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 산정호수는 1925년에 축조된 인공호수이다. 산속의 우물 같다하여 산정(山井)호수라 이름 하였는데 6.25 한국전쟁 전에는 이곳이 38선 이북지역이어서 김일성(1912~1994) 별장이 있었다. 호수의 모양이 한반도 지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 작전 구상을 위해 별장을 지어놓고 자주 머물렀다고 하는데 별장이 위치한 곳은 산정호수의 수구(水口 : 물 나가는 곳) 쪽의 바람길 이어서 별장터로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산정호수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보면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산이 있는데 호수 뒤쪽에 명성산(鳴聲山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 순천(順天)은 연간 400여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산수(山水) 좋은 고장이다. 순천은 승평 또는 사평(모새들)이라고 불렸다. 견훤의 후백제(892~936)가 멸망하고 고려(916~1392)의 건국을 도와 하늘순리에 따른 땅이라 하여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다. 순천에는 순천만정원, 순천만갈대밭,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그 중 낙안읍성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 백제 때에는 파지성, 고려 때는 낙안군의 고을 터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왜
[오피니언타임스]논산(論山)은 포효하는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단전부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군대를 다녀왔고 논산 훈련소의 훈련과정을 거친다. 훈련을 통해 군인으로서 기본요건을 갖추는 이곳 논산은 부여를 중심으로 공주 익산과 더불어 백제의 주요 핵심도시였다. 논산은 계백장군(?~660)이 이끄는 5000여명의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595~673)이 이끄는 5만여명의 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논산의 원래 지명은 득안(得安)이었다. 논산이 편안해야 백제가 편안하다고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3국을 순례하면서 왕궁, 사원, 성당 등 고대문화 유적지를 둘러봤다. 중세시대에는 어떤 곳에 터를 잡았는지 터 잡기의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터 잡기의 방법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한다. 지형과 기후에 따라 터 잡는 방법은 일부 다를 수는 있어도 풍수지리적으로 그 근본은 동일한 것 같다.고대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적으로부터의 방어, 둘째 식량의 조달이다.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항상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새지역은 지배권자가 바뀌고 종교가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예로부터 생거진천 사후용인(生居鎭川 死後龍仁)이라 하여 진천과 용인은 풍수지리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왜 살아서 진천이고 죽어서 용인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전해오는 풍수설화에는 대개 3가지 전설이 있으나 자연의 형상을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용인과 진천은 생기가 모이는 요건을 구비하였다.진천은 백두대간의 용맥이 속리산에서 분기하여 한남금북정맥으로 안성 칠장산까지 올라와서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진하던 용맥이 다시 남서진하면서 금북정맥을 형성하는데 진천의 주산은 만뢰산(611.7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조선이 개국하면서 어디를 도읍지로 정할지를 두고 계룡산 신도안, 서울 무악(현재 신촌), 서울 한양(현재 사대문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벌어졌는데 풍수적으로 가장 뛰어난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됐다. 서울 한양은 북악산 주산이 장대하고, 사신사(四神砂)가 겹겹으로 감싸주며, 내당수 청계천이 역수하고,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마주하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여 장엄한 기운을 공급하며, 명당이 넓고 평탄하여 최고의 길지로 평가됐다. 서울은 조선조가 도읍지로 정한 이래 518년 동안 이어졌고, 600여년을 국가의 수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강원도 춘천 강촌에 가면 구곡폭포를 돌아 산속 깊은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을 문배마을이라 한다. 문배마을은 돌배보다는 조금 크고 일반 배보다는 작은 문배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마을의 모양이 배를 닮았다고 하여 문배마을이 됐다는 설도 있다. 문배마을을 한자로 문배(文背)라고 쓰는데 문헌을 찾아보니 구곡폭포의 옛 지명인 문폭(文瀑) 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문배마을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넓이가 2만여평인 문배마을에는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 문배마을은 6.25동란 때도 피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마을이 형성되려면 첫째로 마을에 지기를 공급해주는 주산이 든든해야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생기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경기도 분당은 한남정맥이 속리산에서 북진하여 안성 칠장산을 지나 할미성에서 산맥이 갈라진다. 하나는 북쪽으로 진행하여 불곡산, 영장산, 검단산을 거쳐 청량산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행진하여 수지의 소실봉, 형제봉을 지나 광교산, 백운산, 바라산, 청계산, 인능산으로 이어져서 분당의 동쪽산과 서쪽산을 형성한다. 그래서 분당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장풍국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877~943)은 개경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몽골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의 23대왕 고종(1192~1259)은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이곳에서 39년간 몽골의 항쟁에 버텨왔다. 1270년 원나라(몽골제국)와 화친하여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강화도의 성벽이나 왕궁의 모든 것을 없앴지만 744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흔적들은 강화도에 남아있다. 고려시대의 왕릉 4개(홍릉, 석릉, 곤릉, 가릉)가 남아 있고 강화의 성벽과 고려궁지가 일부 복원됐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