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이슬람양식의 알람브라 궁전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3국을 순례하면서 왕궁, 사원, 성당 등 고대문화 유적지를 둘러봤다. 중세시대에는 어떤 곳에 터를 잡았는지 터 잡기의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터 잡기의 방법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한다. 지형과 기후에 따라 터 잡는 방법은 일부 다를 수는 있어도 풍수지리적으로 그 근본은 동일한 것 같다.

고대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적으로부터의 방어, 둘째 식량의 조달이다.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항상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새지역은 지배권자가 바뀌고 종교가 바뀌어도 지금까지 유지 보존되고 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 지역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네바다 산맥아래 고원의 평지에 위치한다. 뒤에는 큰 산이 있고 사방이 언덕으로 둘러주고 높은 성곽이 있어 적으로 부터의 방어에 유리했다. 또한 고원의 평지에 물이 나고 땅이 있어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족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을 버텼는데 강화도가 바로 이러한 조건에 합당한 곳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져 있어 기마병으로 무장된 몽골족에게는 강화도는 침략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강화도는 땅이 넓고 비옥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성주의 별장이었는데 네바다산맥 아래 해발 740m의 고지에 있다. 고원속의 평지, 시에라 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740m의 고지임에도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게다가 100m가 넘는 언덕위에 39m 높이의 성곽이 있어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가 쉽고, 4000명까지는 내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중세도시의 궁전의 입지로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1236년 카톨릭 세력에게 코르도바의 지배권을 빼앗긴 무어인의 왕 유세프가 그라나다로 피신해 나스르 왕조를 세우면서 건축됐다. 이후 왕조의 마지막 집권자인 보압딜이 에스파냐 통일을 이룬 부부왕,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패르나도 왕의 연합세력에 밀려 퇴각하기까지 256년 동안 유럽 내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도시로 발전했다.

▲ 여름 궁전에서 바라본 알람브라 궁전 전경, 언덕위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으로 한 밤 중에 성벽과 망루에서 반사된 햇불이 성을 불타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어졌다.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에서 카돌릭으로 종교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보존되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성이다.

알람브라 궁전 지역은 뒷면에 큰 산이 버텨주고 좌우로도 산이 감싸주며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어 그라나다 전체의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중세시대의 왕궁의 입지는 적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해야 하고,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식량의 조달이 원만해야 한다. 요새와 먹거리 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터를 선택함에 있어 지리(地理))가 제일 먼저이고, 생리(生利)가 두 번째이며, 인심(人心)이 세 번째이며, 네 번째가 산수(山水)가 좋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스페인의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은 바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다.

유럽지역의 다른 고성지역을 가 보아도 풍수적 입지를 분석하여 보면 뒤에 산을 의지하고 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 주변으로 강이 감싸주는 언덕위에 위치한다. 소위 풍수에서 말하는 배산임수, 전저후고, 전착후관의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무어인이 그라나다로 밀리기 전의 왕궁 코르도바 고성은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면이 강으로 감싸주는 풍수적 명당지역에 위치하며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문화유적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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