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명재고택 사랑채

[오피니언타임스]논산(論山)은 포효하는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단전부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군대를 다녀왔고 논산 훈련소의 훈련과정을 거친다. 훈련을 통해 군인으로서 기본요건을 갖추는 이곳 논산은 부여를 중심으로 공주 익산과 더불어 백제의 주요 핵심도시였다. 논산은 계백장군(?~660)이 이끄는 5000여명의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595~673)이 이끄는 5만여명의 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논산의 원래 지명은 득안(得安)이었다. 논산이 편안해야 백제가 편안하다고 하여 논산의 성을 득안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논산은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사계 김장생(1548~1631), 신독재 김집(1574~1656), 명재 윤증(1629~1714) 선생 등 조선후기 학문계와 정치계를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들이 살았던 고장이다. 논산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 있는데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爥寺), 백제의 혼이 살아있는 계백장군 유적지, 그리고 윤증선생의 명재고택이다.

명재고택은 소론의 지도자 윤증 선생의 집인데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우뚝하게 솟은 둥근 산봉우리 아래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 명재고택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와 고택을 둘러보면서 명재 윤증 선생의 학문을 살펴보는 곳이다.

작은 언덕을 넘어 윤증고택으로 가면 제일 먼저 사랑채와 만나게 된다. 뒤로는 아름다운 무곡 금성체의 둥근산이 받쳐주고 좌로는 낮은 언덕이 감싸준다. 우로는 연못이 있어 생기(生氣)가 흩어짐을 막아준다. 사랑채는 담장이 없는 개방형임에도 자연적인 언덕과 연못이 담장역할을 대신하다. 사랑채 앞은 마당이 반듯하고 매우 넓다. 사랑채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면 사랑채 앞마당은 마치 유럽의 시내 광장같이 보인다. 사랑채 앞마당은 바람을 잘 갈무리하면서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드는 매우 양명한 곳이다. 본체 앞에는 진응수가 솟으며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을 가두는 연못이 있어 생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주며, 농사철에는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주기도 한다.

▲ 명재 고택 앞 연못

풍수에서 양택의 기본 요건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 전착후관(前窄後寬)이라고 하는데 명재고택은 이 기본요건을 완벽하게 충족한다. 뒷산 가운데 봉우리를 중심으로 아래에 본체가 위치하고 안채로 들어가면 ㅁ자형이며 전후좌우로 건물이 둘러주어 이곳에 오면 마치 작은 왕국을 형성한 듯하다.

대문이 본체와 바로 직충하지 않도록 건물과 건물사이, 건물과 담장사이를 아주 편안하게 공간을 확보하였다. 뒤뜰이나 바깥 공간에도 낮은 담장을 잘 둘러주어 아주 편안함을 갖게 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주인장은 방문을 열어 방안과 방안에서 보이는 전경을 구경시켜 주었다.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바깥세상은 새로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명재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선비로서 추앙을 받았고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명재는 평생을 관직에 몸담지 않았고 청렴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온건하고 절충적이며 주자학과 함께 양명학도 인정했다. 명재가 살았던 집터는 그의 일생과 사상을 대변한다. 사랑채에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현판이 있는데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던 때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당시에도 제자들이 찾아와서 그의 학문을 배웠고 오늘날에도 그가 살던 명재고택이 잘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학문과 살아온 업적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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