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낙안읍성 전경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 순천(順天)은 연간 400여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산수(山水) 좋은 고장이다. 순천은 승평 또는 사평(모새들)이라고 불렸다. 견훤의 후백제(892~936)가 멸망하고 고려(916~1392)의 건국을 도와 하늘순리에 따른 땅이라 하여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다. 순천에는 순천만정원, 순천만갈대밭,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중 낙안읍성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 백제 때에는 파지성, 고려 때는 낙안군의 고을 터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왜구가 침입하자 1397년에 토성(土城)을 쌓았고, 1626년에는 임경업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석성(石城)을 중수하여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중종 25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전국 329개 마을 중 125개의 읍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다 철거되고 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등 몇 개 읍성만이 남아 있다. 이후 전통마을이 점차 복원되어 아산 외암마을,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고성 왕곡마을, 제주 성읍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6대 민속마을 중 하나가 됐다. 낙안읍성은 지명 그대로 삶을 즐기며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민속마을이다.

낙안(樂安)이라는 지명은 기름진 땅에서 온 백성이 편안히 산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됐다. 낙안읍성의 자연환경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요건을 갖추었다. 낙안군의 산세는 금전산 북동쪽에 옥녀봉이 있다. 옥녀가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려고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머리를 풀어 헤친 옥녀산발형의 모습이라고 하며, 낙안읍성은 마을모양이 배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행주형(行舟形)으로 일컬어지는 마을이다. 행주형 마을이라 깊은 우물을 파지 않았고 마을중앙에는 돛대역할을 담당하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읍성 바깥쪽으로는 노의 역할을 담당하는 나무들이 수백년 역사를 간직한 채 읍성을 지켜주고 있다.

▲ 낙안읍성 입구, 동문 앞 광장

낙안읍성의 풍수지리를 살펴보면 삼면이 산으로 둘려지고 사방에서 물이 모여드는 분지형 마을로 북동쪽에 있는 금전산(金錢山, 668m)이 마을의 진산이자 주산 역할을 하며, 동쪽에 오봉산(五峰山, 592m), 동남쪽에 제석산(帝釋山, 560m)이 청룡 역할을 담당하고 서쪽의 백이산(伯夷山, 582m)은 백호 역할을 담당한다. 전면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지며 가운데는 얕은 봉우리인 옥산(玉山, 98m)이 솟아 안산 역할을 수행한다.

낙안읍성의 물길을 살펴보면 우로는 상송제에서 물을 모아 낙안천을 형성하여 마을 앞을 횡류하고, 좌로는 등교제에서 물을 모아 교천천이 흘러 남대리 평촌리의 명당 옥토를 감싸며 이곡리에서 합수한 후 다시 벌교천과 만나 남해로 흘러간다. 풍수에서는 산에서 인물이 나고 물에서 재물이 난다고 하는데 사면을 다섯 개의 산이 조응(照應)하고 두개의 하천이 합수하니 오산이수(五山二水)의 땅이요, 산관인정 수관재물(山管人丁 水管財物)의 명당 터다. 마을지형과 배치를 살펴보면 분지형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성(城)을 쌓아 바람이 갈무리되고, 읍성 전망대로 오르는 언덕이 있어 마을의 기운이 응집되고, 해자(垓子: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를 파서 생기의 설기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순천의 낙안읍성은 전면에 너른 명당이 펼쳐져 있어 지리(地理)적 조건과 맞물려 생리(生利)적인 조건도 좋다. 마을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형국에 맞는 배치와 담장, 언덕조성, 해자설치, 나무식재 등 풍수적 비보(裨補)도 실시하는 등 계획도시를 건설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읍성을 철거할 때에도 낙안읍성은 살아남았으며 오늘날 산업화 시대를 맞아서도 마을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으며 현재는 전국 6대 민속마을의 하나로 선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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