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오피니언타임스] 20·30대 사이에 번지고 있는 신조어 ‘헬조선’은 우리 사회와 기성 세대에 대한 냉소와 분노, 체념과 자조(自嘲)를 담고 있다. 헬(hell)은 지옥, 조선(朝鮮)은 대한민국이다. 청년층이 헬조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극심한 취업난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을 위한 공부와 스펙 쌓기에 매달리느라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하는 ‘5포 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 세대’라고까지 불린다. ‘열정페이’라는 표현도 ‘88만원 세대’에 못지 않게 그들을 자극한다.

▲ ©포커스뉴스

국정화 논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헬조선인’의 아픔을 보듬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동개혁이 우리 사회의 급박한 화두인가 싶더니 어느새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헬조선에 산다고 생각하는 헬조선인들은 국정화 논란을 어떻게 볼까. 지난 16일 한국갤럽에서 헬조선인들의 생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를 내놓았다. 국정화 찬반 논란 속에 사흘간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일주일 전보다 4%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화 추진에 대한 반응은 찬성과 반대가 42%로 팽팽하게 갈렸다. 반대는 젊은층과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에서 우세했다.

헬조선인들을 실력 쌓기를 게을리하고 분수를 모르는 불평불만분자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올해 초 나온 현대경제연구원의 ‘청년 니트족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5~29세 청년층 950만7000명 가운데 일하지 않고 있으며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163만3000명으로 17.2%나 된다. 청년층 취업자 비중은 2005년 45.3%에서 지난해 40.5%로 4.8%포인트 하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우리나라 청년 니트족은 OECD 회원국의 약 2배에 이른다.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는 고용 대책의 핵심은 15~29세 청년, 청년 고용의 핵심은 니트족을 취업자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같은 통계를 보면 헬조선인들이 기성 세대의 ‘노력 부족’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를 수긍할 수 있다. 그들은 헬조선 사이트에서 ‘미친 꼰대들의 노오오오력 타령은 어딜 가나 다 있구나’하고 비튼다. ‘수저론’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들은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자식들이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똥수저를 물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한국의 상류층 자녀들은 부모의 권력과 재력 덕으로 스펙을 쌓고 취업을 하고 사회적 지위와 재력까지 대물림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맛에 헬조선을 살지(이맛헬)’라는 자조 섞인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는 ‘노답’(답이 없음)이므로 ‘탈조선’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이민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취업 청탁 같은 ‘갑질’ 뉴스에 분노를 표하면서도 “이맛헬”이라고 자조한다.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에도 “헬조선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라는 것”이라며 “이맛헬”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현행 중·고교 역사교과서는 배우면 배울수록 패배감에 사로잡히고 모든 문제를 사회탓, 국가탓을 하는 국민으로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노오오오옴들!!! 사회탓 국가탓 하지 말고 자기탓을 하란 말이다”라고 비아냥댄다.

▲ 문재인 대표, 이종걸 원내대표 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12일 국회에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규탄 대회를 하고 있다.©포커스뉴스

청년층 취업난은 발등의 불

우리 사회에는 빈곤한 노년층과 노인 자살, 과도한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초·중·고교생 문제 같이 헬조선으로 여기게 하는 과제가 적지 않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은 청년층의 취업난이다. 박근혜 정부는 올해 안에 노동개혁 관련 법안과 경제 활성화 및 민생 관련법안과 한·중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노동 개혁 법안이 상당한 진통을 요하는 지난한 과제라는 것이다. 여권의 개혁안은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기 보다는 기업에 부의 쏠림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야권은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완화, 기간제법과 파견법 개정 등이 해법이 아니라 노동 개악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권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까지 ‘전선(戰線)’을 확대했다. ‘역사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다. 게다가 국정화 논리도 조악하다. 도대체 ‘국사학자의 90% 이상이 좌파’라는 발언에 관련 학과와 동료 교수들이 수긍할 것인지, 국민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생각이나 해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선이 지나치게 확대되면 모든 개혁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국정화 반대론은 점점 세를 얻는 듯한 분위기다. 국정화에 집착하다 보면 민심 이반과 국정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여권은 검정을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노동개혁 실패하면 일제히 등돌릴수도

사실 헬조선인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일률적으로 반대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국정화 논란으로 인해 노동 개혁이 물 건너 가게 되면 국정화를 제기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일제히 등을 돌릴 수 있다. 헬조선 사이트의 표제는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섬뜩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죽창’은 가진 것이 없는 데다 자신들의 처지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비유로 봐야 할 것이다. 또 모든 게시글에는 ‘헬조선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라고 큼지막하게 부제를 붙였다. ‘오늘도 평화롭다’는 것은 언제든지 분노를 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부디 여야가 이념 경쟁을 떠나 청년들이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도록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데 힘써 주기 바란다. 나아가 극단적인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를 지양하고 반칙과 특권이 없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내년 4월 총선의 향배는 헬조선인들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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