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역사 진실 알리겠다”

며칠 전 한 신문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대표집필자인 신형식(76)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해 실은 기사의 제목의 일부다. 역사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좋다.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지인(知人)들 ‘잘했다’ 거듭 전화”라는 부제를 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집필자로 참여하게 된 것을 격려하는 지인이 몇몇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게 아닌가. 격려한 사실은 침소봉대하고 반대하거나 말린 사실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닌가. 그런 식으로 사실을 호도했다면 역사의 진실을 알리겠다는 역사학자로서의 자질 또한 의심스러운 것은 아닌가.

그래서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참여를 말리는 제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지인들이 ‘잘했다’며 거듭 전화를 걸어온다···”는 말에서 따온 제목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역사학계의 90%가 좌파’라는 여권의 주장에 비춰 보면 대다수가 침묵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진실의 기능은 숨어 있는 사실도 규명하는 것이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올바른 역사교과서 집필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포커스뉴스

랑케의 사실주의, 역사를 과학으로 자리매김토록 해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는 사실의 규명, 사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역사가들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아를 지워 버리고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얘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사료는 회고록, 일기, 서간, 외교관의 보고서, 목격자의 진술 같은,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엄격한 1차 문서 자료에 국한됐다. 그가 믿는 역사 서술 방법은 감정과 가치판단, 주관성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다.

랑케의 사실주의와 객관주의는 왕가의 족보 또는 소설에 불과하거나 신학과 철학 속에 종속돼 있던 역사를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랑케의 역사 서술 방법론은 언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언론 보도의 사실성과 객관성, 정확성이 중요시되기 시작하면서 신문윤리강령 제정과 저널리즘의 법제화로까지 이어졌다.

©픽사베이

카는 가치의 객관성 추구,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어

랑케보다 한 세기 늦게 태어난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랑케의 실증 사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당한 상호 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랑케가 ‘사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게 역사가의 임무’라고 한 데 대해, 카는 완전한 객관적 실증주의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며, 역사 해석은 역사가의 가치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사실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카는 역사에서 해석이 전부가 되고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극단을 경계했다. 그는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억압적인 주인도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카는 역사란 민주주의적 가치들이 확장되어온 과정으로 생각했다. 역사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치의 진실성이었다. 따라서 카는 역사가에게 기대해야 할 것은 사실의 객관성보다는 가치의 객관성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객관적 가치란 이성의 역할과 자유의 영역의 확대를 통한 인류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교육부가 보관 중인 현행 검정 역사교과서 8종.©포커스뉴스

랑케의 진실과 카의 가치 추구 지켜볼 것

랑케와 카는 세계 역사학계의 거대한 산이다. 이제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국내 역사학계는 물론 비전문가인 일반인들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랑케의 사실주의와 객관주의, 카의 가치의 객관성을 기준으로 국정 교과서 집필을 지켜보지 않을까 싶다. 랑케에게 사실의 추구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국정 교과서 집필자들은 랑케의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적 가치들이 확장돼 왔다는 카의 주장을 되새겨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부 대표 필진을 제외한 나머지 집필진들을 공개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밝혀질 수밖에 없다. 집필진들은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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