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 여러분께서는 ‘진주라 천리 길’이란 노래를 기억하시는지요? 낙엽이 뚝뚝 떨어져 땅바닥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늦가을 무렵에 듣던 그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 쓰리고도 애절하게 만들었지요. 1절을 부른 다음 가수가 직접 중간에 삽입한 세리프를 들을 때면 그야말로 눈가에 촉촉한 것이 배어나기도 했답니다. 오늘은 식민지 후반기의 절창으로 손꼽히는 ‘진주라 천리 길’,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 이규남(李圭南, 1910∼1974)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끌러놓고자 합니다.

낙엽 떨어지는 늦가을, 애절한 ‘진주라 천리길’

흘러간 식민지 시절에는 성악을 공부하던 이가 대중가수로 방향을 바꾼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사의 찬미’를 불렀던 윤심덕을 비롯해 채규엽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윤심덕의 경우는 경제적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립니다. 다음으로는 김용환, 정재덕, 김안라, 김정구, 김정현 등 음악가족이 떠오르네요. 그들은 성악과 연주 활동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지만 당시로서는 더욱 화려해 보이는 대중음악으로 방향을 수정했고, 마침내 성공한 경우입니다.

여성가수로는 왕수복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왕수복은 평양기생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기반에 대한 수치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항시 틈만 나면 성악가로서의 길을 모색했었습니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뜻을 이루어 대중음악을 서슴없이 버리고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어간 경우였지요. 왕수복의 경우는 열등감에서의 탈출이 우선 목표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부른 이규남은 분단 시기에 납북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또 하나의 사례로 우리는 이규남(본명 임헌익)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규남에 대한 전기적 자료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북 분단시기에 그는 어떤 연고로 하여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월북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가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의 조사확인에 의해 납북으로 밝혀진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는 임헌익의 손자 임대우씨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식민지시대에 가수활동을 했던 자신의 조부에 대하여 무척이나 존경과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조부의 행적이 세상에 잘못 알려진 사실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가요사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에서 한국전쟁시기 임헌익의 행적을 납북이 아닌 월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구체적 증언으로 월북이 아니라 납북이었던 사실이 밝혀져 정부로부터 공식적 확인을 받았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가수 이규남은 19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임헌익이었고, 가수로서의 예명은 처음에 본명으로 음반을 발표하다가 이후 본격적 활동을 펼치면서 이규남을 쓰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한때 윤건혁이란 예명을 쓰기도 했으니 도합 세 가지의 이름을 섰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자료에 나타나는 세 이름을 이따금 혼동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지요. 어떤 가요사 자료에서는 임헌익의 본명을 윤건혁으로 잘못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의 도쿄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할 정도로 가정환경은 비교적 넉넉했던 듯합니다.

김복희가 부른 ‘무정의 꿈’ 금속원반과 음반. 빅타레코드 금속원반은 유성기 음반을 대량으로 찍어 보급하던 금형(金型)의 제작 틀로, 1930년대 음악의 대중 보급화를 이끌었던 중요한 자료다. ©국립민속박물관

일본 유학 후 성악 활동하다가 대중가수로 데뷔

이규남, 그러니까 본명이 임헌익이었던 그가 일본에 유학한 지 3년 째 되던 해, 집안은 기울기 시작하여 일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임헌익은 식민지조선으로 돌아와서 서울에 머물며 성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스스로 맹렬한 연습을 했습니다.

1932년, 임헌익은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조선보를 통해 몇 곡의 노래를 본명으로 취입했었는데, 당시 그의 노래들은 대개 서양풍의 세미클래식한 분위기였습니다.

임헌익은 1933년에도 왈츠풍의 ‘봄노래’를 비롯하여 ‘어린 신랑’, ‘깡깡박사’, ‘빗나는 강산’ 등과 신민요풍의 노래를 발표합니다. 이 과정에서 임헌익은 대중음악이 지닌 보편성과 고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헌익은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악에 대한 열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일본에 가서는 바리톤 분야에서 성악을 수련했습니다. 이때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에서는 임헌익의 음악적 재주를 남달리 주목하고 음반 취입을 권유했는데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는 이를 즉시 수락하고 ‘북국의 저녁’, ‘선유가’, ‘황혼을 맞는 농촌’, ‘찾노라 그대여’ 등이 수록된 2장의 SP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임헌익의 활동과 존재는 자연스럽게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계에도 알려졌습니다.

1935년 7월 초순, 일본에 유학중이던 성악가 세 사람이 조선일보 주최 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게 되는데, 이때 임헌익도 김안라, 김영일, 장비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미 임헌익의 일본 데뷔 사실을 알고 있던 서울의 빅타레코드사에서는 작곡가 전수린을 앞세워 마침내 그와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하여 임헌익은 아예 서울에 머물며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로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하게 됩니다.

1936년은 임헌익이 윤건혁이란 예명을 잠시 쓰다가 이규남이란 또 다른 예명으로 서울에서 대중가수로서의 본격적 데뷔를 했던 해입니다. 서양의 성악을 정통이라 여기며 대중음악에 대한 경멸을 갖는 사례는 예나 제나 마찬가지이지요. 이규남의 경우도 그러한 편견을 오랜 기간까지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대중음악으로 방향을 수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경제적 이유가 앞섰겠지만 그것보다도 ‘유행가’라는 장르에 대한 식민지대중들의 뜨거웠던 반응을 확인했던 것이 가장 커다란 배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성악가로서 대중가수가 되기까지 겪었을 주저와 갈등의 과정이 숱한 예명의 사용에서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제는 본명 임헌익, 그리고 예명 윤건혁을 뒤로 하고 이규남이란 새로운 예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1936년에만 ‘골목의 오전 7시’ 등 19곡 발표

가수 이규남은 빅타레코드 전속이 되어서 1936년 한 해 동안 무려 19곡의 유행가 가요작품을 발표합니다. ‘고달픈 신세’가 데뷔곡이었고, ‘봄비 오는 밤’, ‘나그네 사랑’, ‘봄노래’, ‘가오리’, ‘내가 만일 여자라면’, ‘명랑한 하늘아래’, ‘주점의 룸바’, ‘한숨’, ‘아랫마을 탄실이’, ‘사막의 려인(旅人)’, ‘골목의 오전 일곱 시’ 등이 바로 그 곡들입니다. 이러한 노래의 작사를 맡은 사람들은 강남월, 고마부, 전우영, 홍희명, 고파영, 김팔련, 김벽호, 김포몽, 이부풍, 박화산, 김성집, 김익균, 이가실 등이었고, 작곡은 거의 대부분 전수린과 나소운이 맡았습니다. 천일석, 김저석, 이기영, 임명학, 이면상, 문호월, 석일송 등도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들입니다.

이규남의 여러 노래들 가운데서 우리는 ‘골목의 오전 일곱 시’란 노래를 눈여겨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노래에는 1930년대 후반, 서울의 오전 골목길 풍경을 너무도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두부장수, 새우젓장수, 콩나물장수가 번갈아가며 오고가는 골목에는 서민들의 눅진한 삶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두부 사려!’, ‘새우젓 사려!’, ‘콩나물 사려!’하고 외치는 장사치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부사려 두부요 에헤에혜 두부요

두부 없는 찌개가 무슨 맛있나

조려먹고 무쳐먹는 두부로구려

(두부사려 두부요)

두 모 밖에 안 남았소 부억 마나님

에헤야 두부요 두부사려

 

새우젓이요 새우젓 에헤에헤 새우젓

깍두기를 담을 때 생각나는 것

시아버님 진지 상에 빼놓지 마소

(새우젓 사려 새우젓이요)

짭짤하게 잘절었소 젖좀보이소

에헤야 새우젓 새우젓 사려

 

콩나물이요 콩나물 에헤에헤 콩나물

죽을 쑤어 먹으며 콩나물죽

끓이고 무쳐먹는 콩나물이야

(콩나물 사려 콩나물이요)

시집보낸 색시처럼 잘도 자랐소

에헤야 콩나물 콩나물 사려

-‘골목의 오전 일곱 시’ 전문

갓을 쓴 사람이 신기한 듯 빅타축음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이규남 아낀 홍난파가 나소운 예명으로 여러 노래 작곡 맡아

여기서 나소운(羅素雲)이란 이름을 다시금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소운이란 바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수필가였던 홍난파(본명 홍영후, 1898∼1941)의 또 다른 예명이었지요. 홍난파는 대중음악 작품을 발표할 때 나소운이란 예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규남의 노래에 특별히 다수의 작곡을 맡은 까닭은 홍남파가 서양음악을 전공하던 후배 이규남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빅타레코드사에서 이규남과 함께 듀엣으로 취입했던 여성가수는 김복희였고, 박단마, 황금심, 조백조 등과도 남다른 친분을 가졌습니다.

이규남은 1937년에도 빅타에서 스무 편 가량의 가요작품을 취입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유행가였고, 신민요 작품도 더러 있었지요. 일본 빅타사에서는 이규남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가 그해 7월에 ‘미나미 구니오(南邦雄)’란 일본 이름으로 유행가 ‘젊은 마도로스’ 등 몇 곡의 엔카를 발표하게 하는데, 이 작품은 일본 가요팬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규남은 1940년까지 빅타레코드사에서 수십여 편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기에 이규남이 ‘골목의 오전 7시’, ‘눅거리 음식점’ 등과 같은 만요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규남의 창법과 음색의 특징이 광범위한 보편성을 지녔고, 어떤 노래를 취입해도 대개 잘 소화를 시켰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941년 이규남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불후의 명곡인 신가요 ‘진주라 천리 길’(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콜럼비아 40875)을 발표합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대사)

진주라 천리 길을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어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천리 길’ 전문

가야금과 장고를 연주하는 평양 기생학교 기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다이쇼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 발행. 엽서에는 左 1번째 왕수복(가야금)이라고 적혀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1941년 발표된 ‘진주라 천리길’… 식민지 백성들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 쏟아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백성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규남은 식민지시절 일본 유학의 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음반과 바늘을 팔았습니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느낀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바로 곡을 붙였습니다. 그리곤 이규남을 불러 이 노래를 취입하도록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노래를 들어보면 절절히 와 닿는 섬세한 파토스가 가슴속에서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목록에 들어있었는데, 그 까닭은 작사자, 작곡가, 가수 모두 북한으로 올라가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가실은 조명암의 예명이요, 이운정은 이면상의 예명입니다. 이 노래 때문에 일제 말,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이규남은 군국가요를 취입하는 일에도 강제동원이 되었습니다. 일제가 인기가수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철저히 체제선전에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가락과 여운… 조촐한 노래비조차 없는 현실 안타까워

이규남은 일제말 전남 법성포로 가서 음악교사로 활동했습니다. 호젓한 바닷가 어촌마을에서 이규남 부부는 그나마 작은 삶의 여유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지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규남은 북으로 납치돼서 북한 정권에 이용당하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일단 내무성 예술단 소속으로 가수로서 활동을 계속 이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도 약간의 활동 흔적이 보입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가요사 자료는 1974년에 이규남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과 북은 갈라져 있지만 ‘진주라 천리 길’의 애절한 가락과 여운은 지금도 우리 귀에 잔잔히 남아있습니다.

해마다 경남 진주에서는 남강에 화려한 꽃등을 띄우고 즐기는 유등축제를 열고 있는데, 강변 어디에서도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이나 이규남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남강 둑이나 강으로 가는 길목 어디메쯤 이 노래의 가사를 새긴 조촐한 노래비라도 하나 세우게 된다면 진주시민들로서는 얼마나 자랑이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우리가 잊고 지낸 한국근대 대중문화의 소중한 자료를 되찾아서 마음에 아로새기는 즐거운 쾌거가 될 것입니다. 과연 어느 분이 나서서 두 팔 걷어 부치고 이 뜻 깊고도 귀한 일을 해주실지?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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