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부패한 권력은 음습한 곳으로 숨어든다. 암세포처럼 서로 결합해 덩치를 키운다. 이렇게 한번 썩은 권력은 아무리 방부재를 뿌리고 도려내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권력은 무기에서 나온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대선 후보인 현역 국회의원 장필우(이경영), 재벌인 미래자동차 회장 오현수(김홍파), 유력 일간지 조국일보의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의 결합. 이들은 각기 정치, 돈, 글이란 힘을 서로 빌려주고 나누면서 공생의 ‘부당거래’를 한다. 이른바 정·경·언 유착이다. 방해자에게는 무자비하고 세상에는 뻔뻔하다.

영화 ‘내부자들’ 스틸컷 @쇼박스

영화 ‘내부자들’, 정·경·언 유착 비리 생생하게 고발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작은 권력들이 기생한다. 깡패인 안상구(이병헌)도 그 중 하나다. 안상구의 비극은 자신의 무기인 주먹이 불법이라는 것,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이용한 자가 도려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욕심을 낸 데 있다. 때문에 그는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합법적으로 오현수 회장이 은행에서 3000억원을 불법대출 받아 300억원을 장필우의 정치비자금으로 제공한 것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우장훈처럼 빈말이라도 ‘정의’를 외치지 못한다. 대신 자신을 배신한, 불구로 만든 권력에 무모한 복수를 시도한다.

‘내부자들’은 생생하다. 비록 과장과 시대에 조금 뒤떨어진 상투가 있지만 부패 권력의 속성들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고발한다. 그것은 원작인 윤태호의 만화가 가진 힘이 적잖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로 만들어진, 한 작은 마을을 무대로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인간의 추악한 탐욕과 부패를 그린 ‘이끼’가 그렇듯 그의 만화는 단순하다. 심리학자가 사진을 찍듯 인간 내면을 탐색하듯 가장 상징적인 순간을 포착해 그림에 담는다. 여기에 “잡상인이 주는 것 먹다 체하면 나도 모른다”,“한강물 떠서 선거할까”처럼 직설적이면서 풍자적이고, 풍자적이면서 직설적인 짧고 생생한 대사가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현실을 다시 한번 날카롭게 찌른다.

영화 ‘내부자들’에서도 그 모습은 적나라하다. “족보도 없이 대검 갈수 있나”라고 말하는 부장검사에게 “대한민국은 실력보다 빽이고 줄인데, 줄도 빽도 없는 놈은 나가 죽으세요”라고 소리치는 경찰 출신으로 죽어라 공부해 검사가 된 우장훈, 과거 민주화 투쟁이 무색하게, 편향적인 글로 권력과 야합하면서도 “저 같은 글쟁이가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라고 겸손한 척하는 이강희, 언론과 기업의 유착을 “언론사와 기업의 마케팅 파트너십, 좋지”라고 빈정대는 오 회장의 대사와 비자금 이 폭로되자 장필우는 기자회견을 열어 “표적수사, 정치공작”이라고 부인하고, 오 회장은 입원하고, 이강희는 ‘손으로 말장난을 쳐’ 자신은 여우처럼 빠져나가고 안상구를 파렴치한 살인청부 성폭행범으로 몰아버리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현재가 아닌 과거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들은 대중들을 아무리 분노해도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지는 개·돼지 취급 하고, 언론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협박으로 은행장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불태워(자살) 버리고, 조작으로 증인들의 입을 봉하거나 위증을 하게 만든다. 우장훈의 말처럼 그들은 괴물이다. 암 덩어리처럼 물어뜯기면 뜯길수록 더 괴물이 된다. 그들에게 세상은 정해져 있다. 주인공은 영원히 주인공이고, 그의 밑에서 기생하며 똥을 치우고, 똥구멍을 닦아주어야 할 인간은 영원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 질서를 어겼을 때, 개가 어설프게 짖으면서 주인 밥그릇까지 넘보거나, 크기가 다른 자리를 욕심내거나, 청소만 하지 않고 쓰레기까지 훔치려고 하면 “감히”라는 말로 철저하고 무자비한 보복과 응징을 가한다. 우장훈을 좌천시키고, 안상구의 손목을 자른 것처럼.

@쇼박스

부패권력 무너뜨려 카타르시스 제공··· 현실에선 불가능

현실은 여기까지다. ‘좇는 것은 같지만 더럽지는 않은’ 우장훈의 정의도 안상구의 복수도 불가능하다. ‘내부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부자들’은 다큐멘터리도, 실화도 아니다. 영화다. 허구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비록 허구일망정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어한다. 관객들도 그것을 원한다. 그래서 안상구도 우장훈에게 영화 한편 하자고 말한다. 이때부터 ‘내부자들’은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극처럼 활극을 펼친다. 안상구는 우장훈의 도움으로 호송도중 탈출하고, 우장훈은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 안상구가 이강희의 손목을 자르면서 녹음한 파일로 거래를 해 대검중수부로 들어가 그들의 ‘내부자’가 되어 성접대 장면을 녹화하고 휴대폰으로 무차별 유포해 그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그러나 안상구와 우장훈의 정의와 복수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라면 어떻게 될까. 안상구가 앞서 혼자 복수를 위해 시도하려다 개봉도 못한 영화와 같은 운명, 아니면 그런 영화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끝나지는 않았을까. 우장훈 역시 나비가 아닌 나방이 되지는 않았을까. ‘내부자들’을 보는 내내 속시원함보다는 착찹한 마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이대현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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