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서울 노인에게 겨울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계절이다.@포커스뉴스

#1

겨울비가 내린 아침,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비가 말끔하게 씻어준 세상은 상쾌했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걸음은 산 어귀 마을언저리까지였습니다. 연립주택들 사이 좁은 골목에 망연하게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봤습니다. 전날 저녁에 수거한 종이상자를 리어카에 실어뒀는데 밤새 젖어버린 모양이었습니다. 물 먹은 상자를 수집소로 가져가봐야 받아주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씩 내려놓고 말려야겠지만 당장 다시 일을 나가야 하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노인의 그 막막한 눈길에서 막막한 우리 현실을 봤습니다.

폐지 값은 노인들이 흘리는 땀에 비해 형편없이 싼 편입니다. 신문은 1kg에 150원, 파지는 110원 정도 한다지요. 거기에 고철이나 빈 병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런 게 흔할 리는 없습니다. 노인 한 분이 한 달 20일을 일 한다고 했을 때 신문, 고철, 병 등을 함께 모은다고 해도 수입은 고작 30만~40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질병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한 달에 20일의 노동을 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결국 열심히 매달려도 30만원 안팎의 벌이를 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이 돼도 노인들은 쉴 수 없습니다. 연탄이라도 들여야 하니 돈은 더욱 많이 필요할 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여름이나 가을보다 폐지와 고물은 줄어들 테니 좀 더 멀리까지 다니며, 좀 더 많이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합니다. 노인의 개진개진 젖은 두 눈에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읽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2

모처럼 고향에서 눌러 사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멀리 남도 땅을 다녀오다 짬이 좀 나서 들른 참이었습니다. 어머님께 인사라도 드리려고 물었더니 일을 나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겨울에 무슨 일거리가 있다고 노인을 한데로 나가시게 하나? 핀잔 섞인 제 질문에 친구는 껄껄 웃기부터 했습니다. 시골에는 농한기에도 노인들이 할 일이 많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늦가을에는 대량으로 수확한 콩 고르기를 한다는 데, 그 품값이 하루 4만5000원이랍니다. 언뜻 들으면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아도, 도시 노인들이 폐지를 주워 버는 돈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커 보입니다.

노인들은 한겨울에도 놀 틈이 없습니다. 시금치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을 한답니다. 난방이 돼 있으니 추울 리도 없습니다. 비슷한 연령의 노인들과 함께 일을 하니 심심하지도 않습니다. 노인들이 일을 나가는 것은 짭짤한 수입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동무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일을 하는 게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일이 아니더라도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노년의 쓸쓸함을 함께 달랜다고 합니다. 거기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따뜻한 밥을 지어서 나눠먹는다는 것이지요. 대개는 부녀회 같은 곳에서 운영하는데 도회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들러 이것저것 후원을 한다고 합니다.

@플리커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단순히 도시 노인과 시골 노인의 삶을 비교해보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결정짓는 것은 개인의 의지보다 운명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런 비교 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 리 없습니다. 시골살이가 도시보다 더 나아보인다고 해서 도시의 노인들에게 시골에 가서 사시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또 이 정도의 사례로 서울 노인은 불행하고 시골 노인은 행복하다는 단정적 등식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질병이나 빚에 시달린 노인들이 적지 않게 자발적 죽음을 선택하고는 하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대조적 사례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거주 노인인구가 2004년 67.9%에서 2014년에는 76.6%로 높아졌다는 사실, 노인의 28.9%가 생활비 충당이나 용돈 마련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일을 해야 하는 노인은 많아지고, 일거리는 늘어나지 않으니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지요. 정책 입안자들이 도시의 환경과 시골의 환경을 비교해서 뭔가 묘책을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노인자살률과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1위라거나 독거노인 비율이 23%에 달하느니 하면서 노인문제를 숫자적으로 부각시키는 것 역시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지금 진정 필요한 것은 고령화 사회를 함께 대비하고 헤쳐 나가겠다는 공동의 의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즉, 다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눈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풀어나가는 단초로 삼았으면 싶어서 서울 노인과 시골 노인의 삶을 예로 든 것입니다.

사실, 거대 담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변부터 둘러보는 관심과 따뜻한 시선입니다. 구조적인 빈곤과 질병도 문제지만 외로움, 주변과의 단절감이 노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니까요. 쓸쓸하게 한 생애를 접는 우리 곁의 노인이야말로 최선을 다해 한 세상을 건너온 분들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일궈 밭을 만들고 씨를 뿌려 오늘을 가꿔낸 분들입니다. 내 할머니·할아버지, 내 부모라는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을 줄 일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노인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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