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의 경제산책]

금융계 퇴직자 A씨는 자주 인터넷 화상대화를 한다. 호주에 유학 가서 의사로 ‘성공’하고 약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두 딸을 화상으로라도 보고 싶어서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시켜 나름대로 성공한 모델로 주변의 시샘도 받지만 그는 말년이 외롭다. 친구들은 손자 손녀 봐주느라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고 하소연하지만 그것이 나름대로의 자랑이고 보람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런 통증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픽사베이

자녀 해외 유학 보내고 노년의 외로움 달래는 부모들

두 딸을 보러 1년에 여러 번 호주에 가기도 항공비 부담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성년이 된 딸들과 살기 위해 이민을 가기도 어렵다. 부부가 한국에서 오래 살아 친구들과 친지가 다 여기 있어 훌쩍 한국을 뜰 수도 없다.

금융계 임원으로 재직 중인 B씨의 두 딸도 호주로 유학을 보냈다. 거기에서 큰 딸은 약사이고 작은 딸은 간호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다. 중국인과 현지에서 결혼한 첫딸은 호주에서 자리를 잡았고 간호사가 되려는 둘째 딸도 이미 한국과 멀어져 호주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서 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아직 현직에 있는 B씨는 둘째 딸의 학비를 대주고 있지만 역시 딸들과 같이 살지 못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7080 베이비부머 세대들 가운데 젊어서 비교적 ‘잘 나간’ 경제적 여유층의 상당수가 자녀들을 중고등학교 때 해외에 유학시켰다.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운운하며 해외 바람을 불어 넣으면서 아이들을 외국에 내보내는 풍조가 10여년 이상 불어닥쳤다. 영어를 배워야 출세하고 행세 깨나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을 국내에 두다간 뒤처질 것 같은 위기감에 해외로, 해외로 아이들을 보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영국 등으로 조기 유학생들이 몰렸다.

@픽사베이

세계화 바람 탓에 마구잡이 유학으로 실패도 많아

A, B씨는 그래도 자녀들이 현지에서 기반을 잡은 성공 사례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국내에서 공부도 시원치 않은데 부모 경제력 덕에 외국으로 나간 아이들은 사고치고 골치 썩이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한 조기 유학생들이 국내로 다시 들어왔으나 별 볼 일이 있을 수 없다. 아직도 인맥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 인맥도 없는 데다 별로 알아주지 않는 외국대학을 나온 탓에 취업도 어려워 빌빌대는 사례가 적지 않다. 부모 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고 국내에서 혼자서 돈을 벌어 부치는 기러기 아빠들도 많다.

지나고 보면 조기 해외유학과 기러기 아빠는 7080세대가 빚은 시행착오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세계화’가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낳았는지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가족의 빈자리는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우울한 일이다. @플리커

한때의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가족과 삶의 의미 새겨야

인간이 한 평생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 것이고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조기유학간 아이들과 그들 부모의 노년을 보며 생각해본다. 가족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아무리 잘 되고 출세한들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영국의 기숙사 명문학교로 유명한 이튼스쿨 졸업생들이 졸업 후 기억나는 것 중 하나로 어려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데서 오는 ‘외로움’을 지적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부모를 그리워하며 고독해하고,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는 부모들이 고독해하는 모습이 요즘 한국 7080세대의 조기유학 집안 풍경이다. 자녀들과 매일 만나서 울고 웃고 떠들고 밥 같이 먹고 자녀들이 커가면서 겪는 고민과 고통을 들어주고 대화하고 같이 어울려 사는 평범한 생활이 삶의 모습 아닌가.

자식들 그리워 화상 대화를 하며 눈물짓는 부모들은 이미 자신들이 저질러놓은 결과를 감당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풍조와 유행에 쉽게 휩쓸리는 한국사회에서 A, B씨도 어찌보면 동조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어떤 새로운 풍조와 유행이 몰려올 때 진정한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고 신중히 결정을 내려는 태도가 한국 땅에서는 필요할 듯하다. 연말연시를 맞아 더욱 그런 생각이 절실하다.[오피니언타임스=이상일]

 이상일

  전 서울신문 경제부장·논설위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