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황성옛터’(원제목: ‘荒城의 跡’)란 노래는 1930년대 당시 식민지 백성들의 상처받고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준 기막힌 절창이었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왕평(본명 이응호)입니다. 작곡가는 경기도 개성 출생의 전수린, 가수는 역시 개성 출신 이애리수(본명 이음전)입니다. 왕평은 어려서 어머니 잃고 서울의 친척 댁에서 성장했지요. 배재중학 마치고 조선배우학교를 거쳐서 악극단 ‘연극사(演劇舍)’의 단장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말이 단장이지 영세하고 보잘것없는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며 살아가는 고달픈 유랑 연예인이었지요.

이애리수, 망국의 슬픔과 서러움 담은 ‘황성옛터’ 가수로 명성 떨쳐

경기도 개성에는 멸망한 고려의 왕궁 터만 남아있는 만월대란 곳이 있는데, 왕평, 전수린은 어느 날 그곳을 다녀와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노래 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가을 달밤의 애상과 비감한 정취, 악극단 생활의 유랑과 비애, 망국의 슬픔과 서러움 등의 정서가 혼합된 그 노래를 극단의 여배우 이애리수에게 부르게 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무척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로부터 이애리수는 배우란 본업보다도 ‘황성옛터’ 가수로서 더욱 명성이 높아갔습니다. 1930년대 초반 서울의 극장 단성사 앞에는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관객 중 연희전문 재학생 배동필이 이애리수를 사모하다가 사랑에 빠졌는데, 이미 처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던지라 둘은 결혼에 골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안타까운 비련이 마침내 정사 소동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기막힌 동거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그 사연이 보도된 신문 기사는 사회적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음반 판매량을 올리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가수 이애리수는 줄곧 숨어살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했었던 듯합니다. 몇 해 전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요양원에 입원하고 있던 이애리수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져 크게 화제가 되었으나 그 직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무려 100살이었습니다.

매일신보에서 보도한 이애리수와 배동필(작은 사진)의 정사 소동.©이동순

절창 작사한 대중문화예술인 왕평 선생 급사 후 70년 동안 잊혀져

1940년 평북 강계 공연에서 악극단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단장이었던 왕평은 다른 배우의 대역으로 무대에 올랐다가 열정적 연기 중에 쓰러져 뇌일혈로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왕평은 무대 위에서 세상을 떠난 보기 드문 대중 연예인입니다. 그때 왕평은 33세의 노총각, 인기 만담가였던 동거녀 나품심(羅品心)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요. 나품심은 마치 정실부인처럼 머리를 풀고 사랑하는 왕평의 화장한 유해를 가슴에 안은 채 애인의 부친이 살고 있던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수정사란 사찰 맞은편 북쪽 산기슭에 묻었습니다.

이날 서울의 다수 동료 연예인들이 함께 내려가서 왕평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가수 남인수는 ‘오호라! 왕평’이란 장송곡을 취입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일본경찰이 왕평의 무덤 매장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분묘는 봉분조차 없이 마치 강아지무덤처럼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왔습니다. 그날 이후로 왕평은 세월의 풀덤불에 묻힌 채 완전히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평의 애인이었던 나품심은 남북 분단 과정에서 북으로 올라가 북한만담계의 기초를 닦은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필자는 진작 왕평의 업적에 대하여 주목하고, 그의 삶과 대중문화 활동을 연구해서 학술적으로 정리해보려는 뜻을 가졌었는데요. 결국 ‘1930년대 식민지 대중문화운동의 성격-최초로 발굴 정리하는 왕평 이응호의 생애와 활동’이란 방대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감격입니다.

수년 전 어렵게 수소문해서 왕평 선생의 유족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었고, 팔순 아우의 안내를 받아서 왕평 묘소에 당도할 수 있었지요. 왕평 무덤에 오르니 현장은 말 그대로 ‘황성옛터’였습니다. 시절은 늦가을이라 가랑잎들이 무덤 위에 켜켜이 쌓여있었는데, 수북한 낙엽을 걷어내니 봉분도 묘표(墓表)도 없이 적막하고 초라한 무덤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왕평 선생과 만난 첫 대면입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 없난 이 심사를 가삼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가요 ‘황성옛터’ 전문

‘황성옛터’ 가사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시켜 주는 듯 처연하고 참담한 광경에 필자는 현기증으로 몸의 중심조차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간략한 제물을 무덤 앞에 차려놓고 우선 술 한 잔을 부어올리니 가슴 속에서 비감한 심회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필자는 수년 전에 완성했던 왕평 선생 관련 논문을 무덤 앞에 정중하게 헌정했습니다. 더불어 힘들게 메고 올라간 아코디언을 가슴에 안고 왕평 선생 무덤 주변을 빙빙 돌면서 ‘황성옛터’의 3절까지 연주했습니다. 어느 틈에 눈가에선 슬그머니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여러분! 아코디언을 메고 지난날 악극단 악사처럼 '황성옛터'를 처량하게 연주하면서 왕평 무덤 주위를 돌고 있는 그 광경을 한번 상상이나 보십시오. 기막힌 정경이 아니겠습니까? 선생 영혼이 만약 필자의 연주를 들었다면 무덤 속에서 황급히 나와 후배의 손이라도 잡아주셨을 것입니다. 묻힌 지 70년 세월이 넘도록 인적 끓어진 곳에서 이렇게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니요.

조촐한 묘비 세우고 색소폰 연주로 영혼 위로해

그 후 필자는 어느 모임에 나가서 벗들에게 그날의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모두들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한국의 훌륭한 대중문화인의 무덤이 이토록 방치되고 있다니 그건 안 될 말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뜻을 모아 묘비라도 세우자는 의견을 모았지요. 유명 서예가의 글씨로 ‘왕평 이응호지묘-황성옛터 시인’이라 새겼습니다. 그렇게 제작한 묘비를 승합차에 직접 싣고 달려가서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조촐한 묘비를 세웠습니다. 묘사(墓祀)를 지낸 다음에 필자는 그동안 틈틈이 연습해둔 색소폰을 들고 가서 ‘황성옛터’를 구성지게 연주했답니다. 나팔소리가 왕평 무덤의 주변 하늘에 무지개처럼 서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날 저녁 필자는 왕평 선생의 넋이 꿈에 와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종내 나타나지 않아서 서운했지요.

이 모든 과정을 어느 방송사에서는 ‘왕평-조선의 세레나데’란 타이틀로 한 시간 분량의 TV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방영했습니다. 1930년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조차도 ‘황성옛터’를 ‘조선의 세레나데’로 부르며 즐겨 부르기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다큐 제작과정에서는 왕평의 영천 생가터, 노래비, 청송의 무덤과 그 일대, 심지어는 일본 로케까지도 다녀왔을 정도이니 왕평과 관련된 유적과 자료들은 아직도 하나둘 씩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우일선의 ‘조선팔경’과 왕수복의 ‘인생의 봄’, 전옥이 주연했던 악극 ‘항구의 일야’ 등을 비롯한 여러 훌륭한 가요작품들이 모두 왕평 선생의 창작물입니다. 인물이 좋았던 왕평 선생은 영화에도 여러 편 직접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경력도 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담 대본, 넌센스, 스켓취 등의 장르에서도 왕평 선생의 작품은 정리가 안 된 채로 많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을 모두 간추리고 확인해서 전집을 발간하는 사업도 필요한 시점에 다다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 인문학과 관련된 소중한 활동이 아닐까 합니다.

‘황성옛터’의 모티브가 된 개성 만월대의 현재 모습. 왕평, 전수린은 고려의 옛 궁궐터였던 이곳을 보고 비감에 젖어 황성옛터를 만들었다. ©문화재청

대중문화사의 빛나는 위인 홀대 안타까워

그동안 한국가요사와 관련된 여러 사업들을 펼쳐왔으나 가장 보람을 느낀 추억은 바로 왕평 선생 무덤 앞에 묘비를 세운 것입니다. 경북 영천시 성내동 13번지에 있었던 왕평 선생의 생가 자리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서 현재는 흉물스런 무인 러브호텔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을 영천시에서 진작 매입하여 ‘왕평기념관’. 혹은 ‘왕평 대중문화관’ 따위의 시설로 탄생시켰더라면 얼마나 멋진 모습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피로와 시련 속에 시달리던 식민지백성들에게 작은 즐거움이라도 주려는 뜻으로 만담 장르에 특히 주력했던 왕평의 활동을 기념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다양하고도 풍부합니다. 가칭 ‘전국개그(만담)경연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하나의 흥미로운 사업구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대중문화사의 빛나는 위인에 대하여 너무도 관리가 소홀하고 무심한 우리의 문화행정에 대하여 새삼 서운하고 개탄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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