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의 종소리]

한국과 일본이 지난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합의한 이후 시간이 갈수록 후폭풍이 심해지고 있다. 언론들은 일본이 법적 책임 인정을 교묘하게 빠져 나간 것에 주목하면서 일본이 원한 대로 ‘불가역적 합의’를 해준 데 대해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위안부 소녀상 이전’을 두고 회담 전후로 180도 태도를 바꾸어 비난을 자초했다. 정부는 양국 외교장관 회담 하루 전까지만 해도 소녀상 철거를 거론하는 일본 언론의 보도에 대해 ‘터무니 없다’고 일축했다. 그런데 정작 회담이 끝나자 말을 바꾸어 그 가능성을 언급했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에서 ‘위안부 협상’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포커스뉴스

일본은 긍정 일색, 한국은 후폭풍 우려 목소리 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긍정 일색과 함께 한국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보적 목소리를 내온 아사히 신문은 ‘환영과 걱정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극우적 시각을 보여온 요미우리는 ‘아베 총리가 보수파의 비판을 각오하고 합의를 추진했다’고 썼다. 요미우리의 보도에서 아베 총리에 대한 찬사를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한 마디로 일본이 자신들이 회담 전 언론을 통해 흘렸던 관심사들을 사실상 관철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 종결 선언을 이끌어냈으며 소녀상 이전 문제도 한국 정부에 책임을 떠넘겼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은 회담 후 일본 기자들에게 “잃은 것이라고 하면 10억 엔”이라고 밝혔다. 기고만장한 일본의 모습까지 엿보인다.

28일 경기 광주 퇴촌면 나눔의집을 방문한 조태열 외교부 제2차관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한·일 정부의 위안부 문제 협상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포커스뉴스

20여년 견지한 핵심 원칙, ‘법적 책임 인정과 위안부 명예회복’ 저버려

반대로 우리 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지난 20여년 이상을 지켜왔던 원칙을 저버려 후폭풍을 불렀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점에 최대 현안이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은)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진상규명을 일본에 요구했다. 김 대통령이 대표적 일본통인 당시 유병우 외교부 아주국장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유 국장의 ‘도덕적 우위’ 원칙은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으로 재단장해 이후 역대 정부가 견지해온 핵심원칙이 됐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가 위안부 문제 종결로까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정부의 이러한 원칙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고노 담화 후속 조치로 1995년 이른바 ‘아시아 여성 기금’을 조성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꼬리표였다. 민간기업에서 모금한 돈에 ‘위로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급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 말기인 2012년에도 일본은 국제 문제화된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해 나름대로 방안을 찾았다. 한국은 배상 개념을 염두에 두고 협의를 했으나 일본은 위로금이라는 꼬리표에 집착했다.

28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노란 목도리가 둘러져 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10억엔 지원을 약속했다”고 30일 보도했다. ©포커스뉴스

이번에도 ‘배상’ 아닌 ‘치유’라고 표현···일본 언론 플레이에 농락 당해

그런데 이번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일본은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 사업’을 위해 정부 예산에서 지원키로 했고 한국도 이에 동의했다. 사용 단어가 바뀌었지만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배상보다 여전히 위로금이라는 냄새가 난다. 그동안 우리가 유지해왔던 법적 책임 인정과 명예회복이라는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능수능란한 언론 플레이에도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이 국가적 현안에 대해 완벽한 공조체제를 이루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매우 유명하다. 이번에도 일본 정부는 언론을 통해 ‘기금 조성 규모 논란’ ‘위안부 소녀상 철거’ ‘최종 종결’ 등 자극적 내용을 흘렸다. 교도통신, 산케이신문, 마이니치신문, TV아사히 등의 기금 조성 규모 논란 보도는 초점을 흐리기 위한 것으로 한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였다. 그때마다 한국 정부는 침묵이나 짧은 부인으로 일관했다. 농락을 당하고도 별다른 반응을 못하는 정부가 안쓰럽다. 지금 외교부 신세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신세와 비슷해 보인다면 지나칠까.

양국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28일도 마찬가지였다. 외교부 차관, 차관보 간부들은 출입 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먹으며 엠바고로 합의 내용을 미리 브리핑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과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위안부 소녀상 철거와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과 같은 폭발력이 강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은 데 있다. 우리 외교관들이 언론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의 언론플레이에 숱하게 당해 놓고도 아직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가 한심하다. 우리는 대일 외교전에서 완패했다. 더구나 우리 정부는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리 설명을 하거나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8월18일 중국 항저우 도서관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도장을 전시하고 있다.@신화/포커스뉴스

향후 사죄의 진정성 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합의문에는 정부의 설명대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으로 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기시다 외상이 읽은 부분 중 ‘군의 관여’ ‘정부의 책임 통감’이라는 표현이나 사죄의 주체를 ‘일본국 내각 총리 대신’으로 명시한 점에서 일본의 향후 조치에 달려 있다. 정부가 일본의 진정성을 끌어내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면 반전의 기회가 있다.

한국과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관련해 상호비판 자제를 합의했지만 위안부 문제는 이미 국제적 이슈가 됐다. 단순히 한일 양국간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유엔이나 다양한 인권단체들이 ‘전시 성 폭력 여성’ 문제의 하나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일본을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이 같은 모임에 더 활발하게 참여해야 한다. [오피니언타임스=이승철]

 이승철

 전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

 서울대 철학과

 저서 한국 외교 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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