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의 종소리]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10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의도행을 꿈꾸는 인사들의 행렬이 가관이다. 전·현직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의도행 열차가 지나가는 정거장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언론인이나 연예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방귀 깨나 뀌었거나, 뀌고 있는 명망가들을 집어삼키는 ‘여의도 블랙홀 현상’이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당 주변 정거장에서 ‘친박’ ‘진박’ ‘가박’ 등 낯 뜨거운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며 서로 싸우는 모습은 한마디로 볼썽사납다. 현직인 정종섭 행자부 장관, 전직인 안대희 전 대법관, 임기 도중에 사임한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 박완수 인천공항공사 사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심지어 팩스로 입당했다가 제명을 당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지난달 9일 337회 국회 15차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이 법안 의결을 하고 있다. 20대 총선이 100여일 남은 가운데 명사들의 국회 입성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포커스뉴스

사회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여의도행에 왜 목을 매는지 궁금하다. 각자의 핑계, 좋게 말하면 이유가 다를 수 있는 만큼 일단 그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자. 하지만 정거장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안대희 전 대법관의 모습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법관이라는 자리는 3권 분립의 한 축으로 우리 사회의 옳고 그름을 정하는 최후의 보루다. 권위와 명예가 필수적인 자리라는 뜻이다. 그 권위는 현직이든 전직이든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대법관 출신 인사들이 변호사 사무소를 개소하거나 법률회사에 적을 두는 데 대해 비판 여론이 뜨거운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그런데 부산 해운대에서 출마 준비를 하던 안 전 대법관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지난해 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만난 뒤 “당 지도부의 취지에 공감한다. 당에서 정하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험지 출마론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언론은 그의 말을 풀이했다. 대법관직을 역임한 사람이 정치권력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안 전 대법관이 사법부에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고 하면 지나칠까.

심지어 친박의 핵심이라는 홍문종 의원은 안 전 대법관과 역시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전 총리에 대해 “(험지가 아니라) 인큐베이터에서 정치적 거목으로 키워야 한다”며 김 대표의 험지 출마론에 반대했다고 한다. 홍 의원의 발언으로 우리나라 정치판은 코미디 판이 됐다.

20대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안대희 전 대법관©포커스뉴스

안 전 대법관에게 여의도에 진출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검사로, 대법관으로 일생을 보낸 만큼 입법 활동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지낸 송민순 전 외교장관은 “외교 전문가로서 균형을 잡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 전 대법관은 전문가들의 창구인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를 노리고 있다. 더욱이 국회에는 이미 많은 법조인 출신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여의도행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사법부의 상징인 대법관 출신이 없더라도 국회가 전문성 부족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우리 국회가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법률적 소양 부족이 아니라 정쟁이 주요 원인이다. 그 경우 당론이란 이름으로 입법을 지연시키거나 흠결이 많은 법률을 통과시켜야 할 때 안 전 대법관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가장 유치한, 그렇지만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다. 안 전 대법관이 만일에 여의도행에 성공한다면 초선의원이다. 당선 횟수가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인 여의도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야가 의사당 내에서 몸싸움을 할 때 어디에 있을 것인가. 몸싸움의 일선은 항상 초선의원 담당이다. 송 전 장관은 싸움에 나서지 않아 당에서는 밉상이었다.

여의도행 블랙홀 현상은 선거 때마다 되풀이해서 일어난다. 올해는 대법관 출신마저 서성거리는 모습에서 비애를 느낀다. 또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노래해야만 하나. [오피니언타임스=이승철]

 이승철

 전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

 서울대 철학과

 저서 한국 외교 24시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