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쳐&마케팅]

희망과 절망 중 어디로 향할 것인가©픽사베이

사방이 위기론 투성이다. 질식할 지경이다. 그런데 위기론만이 답일까?

어떻게 보면 위기는 자연의 건강한 사이클인데···. 잠깐 두 개의 사이클을 보기로 하자. 하나는 사람의 인생 사이클이고 다른 하나는 브랜드 사이클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을 하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성숙기에 다다르게 된다. 성장기에는 몸집이 커지고 근육이 붙고 뼈가 단단해지며 목소리가 커지고 운동력이 늘어난다. 생각의 폭과 깊이도 증가하지만 기운이 사려를 압도하여 성난 말처럼 통제가 어렵다. 이때의 가치는 속도와 힘이다. 그러다가 성숙기에 접어들면 사려가 기운을 다스리게 되고 사회적 외연이 넓어진다. 이때의 가치는 중간 리더로서의 품(品)이다.

기업이 만드는 브랜드도 도입과 성장 그리고 성숙과 쇠퇴기를 맞는다. 성공한 브랜드만 보면, 브랜드 성장기에는 로켓이 발진할 때처럼 많은 자본이 투자되면서 매출이 늘고 시장이 넓어지고 조직엔 건강한 긴장이 넘치게 된다. 이때는 속도가 중요하다. 그러다가 서서히 성숙기에 들게 되면 매출은 정체하고 시장엔 새로운 경쟁 카테고리가 나타나서 노력을 해도 양적인 성과는 예전만큼 잘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숙기 브랜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성숙기의 브랜드는 고정 소비자층을 확보했고 투자도 줄어 성숙한 젖소가 많은 우유를 만들듯 이익은 늘어난다. 그러면 기업엔 여유가 생긴다. 무형의 자산으로는 브랜드 명성이 좋아지고 조직 내 인력 수준도 많이 올라간다. 브랜드 확장의 체력이 마련되는 단계여서 성숙기 브랜드는 선택의 품도 커진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인 새마을기와 잘살아보세 노래 악보. 한국은 70년대에 절망보다 희망을 노래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성장이 관성이 된 한국

한국도 이런 사이클을 타고 왔다. 70년대부터 40년간의 1차(산업화), 2차(정보화) 성장기는 신화라 할 정도로 대단했다. 성장 관성이 생겨났을 정도라 시장 사이클에 성장 외엔 없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 착각했다. 성장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그냥 성장통(痛)이라며 흘리고 지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엔 사이클이 반드시 있다. 이 사이클을 지나면서 사람과 브랜드는 크고 단단해지고, 크고 넓어진다. 한국은 고도 성장기 사이클을 지나 이젠 성숙기로 접어들고 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사회적 피터팬 신드롬이다. 성장기는 속도가 달라야 하고 성숙기는 품이 달라져야 한다.

성숙기는 속도와 양 기준으로 보면 위기처럼 보이지만 질과 격으로 보면 아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런 사이클을 우리는 위기라고만 한다. 사람이 40대로 넘어가는 것이 위기인가? 육체적 동력은 떨어지지만 사회적 품격도 늘고 네트워크도 넓어지고 벌어 놓은 것도 좀 있으니 다음을 준비할 품이 더 넓어진 것 아닌가.

제조 산업이 튼튼하여 히든 챔피언의 나라라는 독일에서 몇 년 전에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을 보면 독일인들은 성숙기 독일을 위기로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돌아보라. 한국이란 브랜드의 명성도 많이 좋아졌고 한류라는 말도 생겨났고(우리는 우리를 욕하지만) 국민적 품도 어느 정도 넓어졌지 않은가. 활력이 넘치던 90년대가 좋은가, 응팔 응구···응응이.

대통령이 10년 뒤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위기론의 감성적 연장이다. 그런데 이 걱정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20년 전에 토한 것과 흡사하다. 우국지정에서 나온 한탄이겠으나 지금 세계의 어떤 국가의 리더가 두 다리 뻗고 푹 잘 것인가. 우리는 무슨 변수가 생기면 그것이 마치 한국만 특별히 그런 것처럼 오도하는데 그것이 물론 특별한 행동력을 촉구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대신 거시적 품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오류임도 생각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은 20년 전 그 앞선 걱정으로 조직의 행동력을 극적으로 강화시켜 엄청난 성장을 이뤘지만, 일사불란한 기업과 달리 수많은 이종 집단이 있고 1998년 IMF, 2008년 금융위기를 겪어냈고 또한 그 속에서도 부의 맛을 본 국민들이 많은 국가 단위에서는 삼성 같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인구 절벽이 코앞이고 중국 경착륙, 중동의 분쟁, 한국 경쟁력 약화, 국민적 에너지 약화 등을 볼 때 초유의 위기라고 언론과 ‘생각조종자’들이 연일 불을 뿜지만 수많은 위기를 겪고 온 국민들의 본능적 안테나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 한해 해외여행 인구가 1400만이 넘는 것은 무슨 징후란 말인가.

꿈의 화법

“난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마음을 움직인 마틴 루터 킹 ©픽사베이

지금 한국이 좋은 상태가 아니란 것은 다 안다. 그러나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폼페이 화산 폭발이나 설국열차 같은 빙하기가 도래한 것도 아니다. 이런 때 국민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위기를 또 또 또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이젠 당신의 꿈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행동경제학엔 넛지(Nudge) 이론이 있다. 넛지는 팔꿈치로 툭 쳐서 누군가를 촉구하는 것인데 일명 ‘부드러운 선택유도 설계’라고도 한다. 지금은 짱돌과 화염병 시위보다는 촛불 시위나 축제형 시위가 더 통할 시대 같지 않은가. 이미 훨씬 전에 마틴 루터 킹이 고통 받던 흑인들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강박적 압박이 아니라 “난 꿈이 있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 꿈은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사회도 움직였다. 이게 바로 인격의 품이고 성숙함의 품 아닐까.

한국도 70년대에 꿈을 말했었다. 잘 살아보자고. “여기서 더 나빠지면 죽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1차원적이긴 하지만 그 꿈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결과 지금 세계 10위 무역대국, 곧 3만 달러 시대고 외국에서는 주저 없이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1차 꿈을 이룬 것이다. 다음의 꿈은 무엇일까? 그 꿈으로 가는 형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일사불란한 국민적 운동이 아니라 이럴 때 당신의 꿈을 스스로 펼쳐보라는 자율과 지성에의 믿음 넛지는 어떨까. 스티브잡스가 애플에 귀환했을 때 일성은 자기를 추방한 세력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같이 꾸자고 한 것이었다. 스티브잡스가 그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의 감격한 얼굴 영상이 인상적이었는데 꿈을 말하니 고객도 반응하고 세상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귀환의 신화는 이루어졌다.

겁만 주는 리더들, 화법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는가! 위기, 혁신, 창조, 더불어···.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쉽게 하니 이미 진부한 췌사의 이정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리더들이 위기라고 험악하게만 말하니 젊은 층들도 헬조선과 흙수저론으로 험악하게 맞받아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오피니언타임스=황인선]

 황인선

 브랜드웨이 대표 컨설턴트

 문체부 문화창조융합 추진단 자문위원

 전 KT&G 마케팅본부 미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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