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에서 쓰는 편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군요. 남쪽 지방을 여행하던 중 SNS에서 그 사진을 봤습니다. 처음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낯설었지요. 검은 치마에 흰 한복저고리를 입은 한 젊은 여성이 손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사진. 그녀의 얼굴에는 주변 상황과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그 앞에 있는 노인의 표정이었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듯 팻말을 바라보고 있는···. 마치 상황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진을 찍은 곳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근처라는 것과, 그 노인이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단체 회원 중 한분이었다는 것은 그 뒤 알았지요.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12차 수요집회’가 열린 가운데, 효녀연합 홍승희 대표와 어버이연합 회원(오른쪽)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포커스뉴스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 합의’ 시위하는 ‘효녀 연합’

젊은 여성이 들고 있는 팻말에는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대한민국효녀연합’이라는 생경한 이름을 볼 수 있었지요. 효녀연합이라···. 언뜻 봐도 어버이연합을 풍자해서 지은 이름 같아 보였습니다. 시선이 오래 머무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페이스북을 찾아봤더니 마침 효녀연합의 페이지가 개설됐더군요. 거기에는 “어버이연합 VS 효녀연합이 본질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충돌이 아닌 졸속 불법 한일 합의를 추진하는 매국정권 VS 시민에 주목해주세요”라는 등 자신들의 지향점을 설명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라든가 ‘역사는 거래할 수 없습니다. 불법 한일밀약 중단하세요’ 등의 문구도 함께 볼 수 있었지요.

마침 인터넷매체 오마이뉴스가 효녀연합을 이끄는 홍승희 씨와 인터뷰를 했더군요. 바로 사진 속의 그 여성이지요. 그녀는 “어버이연합 회원분들이 나오실 때마다 거기 가서 손팻말 시위를 할 계획”이라면서 “막상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상처가 많은 분들이고···. 그걸 이용하는 권력이 나쁜 거니까”라는 말로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담담하게 술회했습니다. 홍승희 씨는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다양한 예술 방식으로 현장에 참여해왔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페인팅 퍼포먼스를 했고, 3차 민중총궐기 때는 살풀이 퍼포먼스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들@플리커

청년층, ‘헬조선’ ‘이생망’의 자폐 공간에 갇혀있지 말아야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늘어놓는 이유는, 그 사진에서 젊은이들이 눈여겨봐야 할 희망의 단초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지금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바닥을 기는 취업률,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 결혼해도 아이를 낳기 두려운 현실, 곳곳에서 터지는 갈등···. 대개 공감하는 현실이니 예를 더 들 필요도 없겠지요. 얼마 전 만난 젊은이는 현실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10년 전쯤 잉여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한 때는 힐링이란 말이 많이도 오갔고요. 요즘은 헬조선이나 흙수저를 지나 ‘이생망’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뜻이지요.”

이번 생은 망했다···.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하지만 생각 끝에서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힘들지 않은 시대도 있었던가?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되고 결혼만 하면 집이 뚝 떨어지고, 부담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고, 미래로 가는 길에는 주단이 깔리고···. 혹시 그런 적이 있었을까? 고개가 절로 저어졌습니다.

그 누구도 고통과 고뇌와 좌절을 헤치며 한 세상을 건너갑니다. 이 땅에도 고비마다 온갖 파동이 있었고 IMF라는 괴물도 다녀갔습니다. 물론, 지금 청년들이 겪는 고통이 별게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때보다 유난히 힘들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당사자 중 하나가 기성세대라 불리는 저 자신일지도 모르니까요.

뜻을 같이하는 이들끼리 손 내밀어 연대해야©픽사베이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마음을 모아 목소리 내야

하지만 불만은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스스로 무게를 더합니다. 폐쇄 공간에서 바라보면 오직 절망과 고통만 보입니다. 그래서 홍승희라는 젊은 여성과 효녀연합이라는 단체에 눈이 더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더 큰 공간으로 나왔습니다. 비관이나 원망을 넘어 뜻을 같이하는 이들끼리 연대하여 우리 시대의 문제를 미소로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불만만 있지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는 애써 눈 감으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일침을 놓은 것이라고 해석해 봅니다.

그녀처럼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를 가둔 틀 속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으로 걸어가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거대한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청년이라는 존재 자체가 희망이 아니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청년들만이 희망입니다. 스스로 희망을 파종하고 수확해야 합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요구할 것은 함께 요구해야 합니다. 이번 생에 무릎 꿇으면 다음 생도 ‘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조금 일찍 걸어온 범부(凡夫)가 외칩니다. 청년들이여! 일어서라. 연대하라. 함께 함성하라.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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