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위세가 등등하다. 인류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국제 사회의 인증을 받는 꼴이니 그럴 만도 하다. 세계 각국이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리려 동분서주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자기 고장의 문화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해 자부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아래)©문화재청

세계 각국 세계유산등재에 열 올려···한국은 이미 세계유산 강국

하지만 세계유산 등재 제도의 권위와 명성이 높아질수록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속화하고 있는 현상은 우려할 만하다. 세계유산 제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분위기는 특히 동북아에서 팽배하다. 국내에서도 세계유산 등재를 기회로 삼아 장기간 조심스럽게 발굴해야 할 유적이 단기간에 한꺼번에 파헤쳐지는 등 부작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종류가 다양하다. 우선 1972년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세계유산(World Heritage)이 있다.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혼합된 복합유산이 여기에 속한다. 세계유산말고도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과 인류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등재 제도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는 2015년 현재 문화유산 779건과 자연유산 197건, 복합유산 31건이 등재되어 있다. 한국은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한 11건이 문화유산에,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자연유산에 등재됐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13건은 세계기록유산, 판소리를 비롯한 17건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세계유산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이미 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 이곳은 일제강점기 한인 징용자들에게 노역을 강요했던 곳이지만 유네스코 등재 이후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가 됐다. ©‘The Truth behind Hashima’ 유튜브 영상 캡처

유산등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본···군함도 등으로 이미지 조작

문제는 세계유산 등재 제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996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원폭 돔’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회원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알리는 대표적인 유적이라는 데 동의해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부각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진 일본의 ‘이미지 조작’이 성공을 거둔 사례이기도 하다.

군함도(軍艦島)로 알려진 나가사키 하시마가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 한인 징용자들에게 노역을 강요했던 절해고도의 탄광을 일본인들은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곳에서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우는 것이 세계유산 등재의 전제조건이었지만, 뚜렷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일본이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본이 유네스코를 정치 공세의 장(場)으로 활용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관련 문서가 중국의 신청으로 지난해 기록유산에 등재되자 유네스코 분담금 동결을 위협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 37억 1800만엔(약 36억 1000만원)을 냈다. 분담률이 가장 높았던 미국은 2011년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을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하자 지급을 중단했다. 유네스코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데 미국도 한몫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들과 위안부 피해자 김화선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속아 끌려가는 상황을 그린 그림.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시도했으나 올해 들어 정부의 지원이 중단됐다.©국가기록원

위안부 기록물 등재 백지화, 경주·백제 유적 조급 개발도 안타까워

이런 상황에서 한국마저 구설수에 오른 것은 안타깝다. 지난해 중국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도 신청했지만 등재가 보류됐다. 국제 사회는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다시 신청하면 등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민간단체와 지원사업 위탁 협약을 추진하다 한·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자 백지화했다. 세계유산 제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정부가 어떤 변명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유적의 진정성이 오히려  훼손 위기에 처하는 현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2000년과 2015년 각각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대표적이다. 경주는 신라의 옛 수도였고, 공주·부여·익산 역시 수도였거나 천도를 계획했던 도시다. 두 지역은 지금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곳곳이 파헤쳐져 조금 과장하면 도시 전체가 공사판을 방불케 한다.

발굴조사는 역사 복원이 목적이어야 한다. 토지 개발로 이루어지는 구제발굴도 있지만 세계유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경주와 백제역사지구에 불어닥친 발굴 열풍에는 역사 복원은 간데없이 영화롭던 시대를 하루빨리 재현해 관광 자원으로 삼겠다는 조급함만 짙게 배어있다. 문화유산이 지역 정치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유적일수록 미래에 넘겨주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굴 기술 또한 발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알 수 없는 사실을 미래에는 밝혀낼 수 있다면 발굴도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유네스코 역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서 움직이는 정치적 조직이다. 그럼에도 세계인이 세계유산 제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국 문화유산의 등재에 기뻐했던 것은 그나마 최소한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기대가 한몫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오염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고, 한국도 그 책임의 일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지금이라도 남의 시각으로 내 것을 평가받는 데에만 들떠 있었던 것부터 반성하고 싶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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