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지난 15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에 대한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고인의 사상과 철학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라며 “존귀한 정신을 계승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인생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사상이나 철학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시대의 스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고인이 남긴 정신은 무엇일까.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 고(故) 신영복 교수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성공회대학교

동양고전을 관통하는 사상의 핵심은 ‘관계론’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뒤 1988년 광복절 특별사면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87년 체제’가 들어선 덕분이었다. 그 후 별세 전까지 10여권의 책을 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출소 후 곧바로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이다. 이 책은 옥중생활 20년의 깊은 사색과 공부에서 길어올린 통찰과 깨우침으로 심금을 울렸다. 지금까지 7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며 영글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강의’(2004년)에 담겼다. 마지막 저서가 된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2015년) 역시 ‘강의’를 보완하고 있다.

신 교수는 ‘강의’와 ‘담론’에서 시경·서경·주역·논어·맹자·노자·한비자 등 동양의 고전을 관통하는 사상의 핵심은 ‘관계론’이라고 말한다. ‘관계론’은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다른 존재와 관계 속에 있으며 그런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17일 고 신영복 석좌교수의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이 빈소 앞에서 명복을 기원하는 촛불을 밝히고 있다.©포커스뉴스

21세기 문명과 사회구성 원리는 존재론이 아니라 관계론

그는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과 사회구성 원리가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인 ‘존재론’은 개별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하고 증식하는 운동 원리를 갖는다고 얘기한다. 반면에 동양의 고전이 설파한 관계론은 세계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망(關係網)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관계론적 패러다임이야말로 경쟁력과 승패를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론적 자본주의 철학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18일 열린 성공회대 대학성당 영결식장에서는 “관계야말로 기쁨의 근원이다”라고 말하는 고인의 생전 영상이 상영돼 울음소리로 뒤덮였다고 한다.

마지막 저서 ‘담론’의 마지막 장에서는 사람이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는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이자 최고의 인문학이라며 이렇게 표현했다.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줍니다. 한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는 석과불식의 교훈은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절망과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일이므로 사람이 ‘끝’이라고 했다.

17일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신영복 추모전시관’을 찾은 한 모녀가 고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포커스뉴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행복···고인의 가르침 되새겨야

신 교수의 사상은 요즘 조명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생각과 상통한다. ‘공유경제’만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창하는 그의 근본 사상은 저서 ‘공감의 시대’(2010년)에 담겨 있다. 그는 공감(empathy)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얘기한다. 치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시대를 넘어 협력과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예전의 경쟁 관념으로는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행동과 협동심이 적자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날로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해 관계에 따라 사사건건 두부모 가르듯 편을 갈라 싸운다.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의 논리를 편다. 말도 점점 험악해진다. 신 교수의 저서 ‘강의’에 따르면 존재론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은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강화하고 증식하려 하는 것이다. 또 ‘담론’에 따르면 사람을 키우려 하기는커녕 사람을 비료와 거름으로 사용하려 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 그 관계는 공감과 연민이 바탕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덜 자기중심적이라고 한다.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주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더 친절하고 더 사랑하고 배려한다. 신 교수의 별세를 계기로 그가 지은 책의 판매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그의 사상과 철학이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며 한다. 우리에게 깨우침과 가르침을 주고 떠난 신 교수의 명복을 빈다. [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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