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뉴케드(새로운 케이블 드라마)란 신조어를 낳고 유행시킨 ‘응답하라’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 끝난 지 두 달. 그 인기와 방영 간격(2012, 2013, 2015)으로 보아 네 번째 시리즈가 빠르면 내년이면 나올 것이다. ‘1997’이 처음이었고, 두 번째 시리즈가 ‘1994’, 세 번째가 ‘1988’로 세월을 조금씩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번에는 격동의 1980년을 향해 “응답하라”고 외치지 않을까.

응답하라 1988 포스터 ©tvN

추억과 복고의 ‘응답하라’ 인기몰이, 위안은 되지만…

이 시리즈가 가진 재미와 감동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집단창작방식, 직접 그 시간을 지나온 연출가와 작가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기억을 불러내는 자잘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에피소드, 그 시대의 아이콘을 축으로 삼는 전략, 적절한 시점이동에 의한 과거와 현재의 비교와 연결, 시대의 느낌을 살린 소품과 무대 등 인기의 요인은 무수하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나 형의 이야기지만 젊은이들에게까지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고 남을 드라마이다.

두 번째 시리즈까지는 한쪽에서 복고 코드니, 퇴행적 정서니 하는 볼멘소리가 나와도 흘려들었다. “언제는 없었나. 현실이 힘들 때 가끔은 낡은 앨범을 펼치듯 과거의 추억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그때 우리 모두는 꿈이 있었다. 새 정부, 새 지도자가 분명 우리들에게 미래 언젠가 행복한 ‘응답하라 2013’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기대가 사라져버린, 그래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그렇더라도 특별한 희망이 올 것 같지 않은 2015, 2016년에도 여전히 ‘응답하라 1988’이라고 외치면서 더 먼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낸 것은 씁쓸하다. 더구나 베이붐 세대의 끝자락인 주인공들이 지금 가장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 앞에 서 있고, 그들의 아들·딸들이 7포 세대임을 감안하면. 이 시리즈가 현실회피 심리를 이용한 상업주의란 비판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가 허구라고, 그저 오락일 뿐이라고 여겼던 영화와 드라마가 때론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절대 영역이라고 여겼던 ‘바둑’까지, 아니 나아가 인류까지 정복하는 충격적인 세상을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오래 전에 미래를 향해 ‘응답하라’고 외치고는 수없이 보여주었다.

과거의 낭만이 위안은 될지 몰라도 암울한 현실을 바꾸진 못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응답하라 2018”이라고 외쳐야 한다. ©픽사베이

희망 잃은 미생들 기성권력층에 미래를 응답하라고 외쳐야 

과거의 낭만이 위안은 될지 몰라도 캄캄한 어둠에 갇힌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뒤를 돌아보고 “응답하라”라고 소리치고 있으면 터널 끝으로 갈 수 없다. 끝은커녕 어둠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 뿐이다. 차라리 현실의 상처와 절망을 솔직하게 들쑤시면서 그 속에서라도 희망의 끈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청년세대에게 얼마나 참담한지 깨닫게 해주는 2014년의 ‘미생’이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

한걸음 나아가 이제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우리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미래의 우리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모습을 바꾸고, 걸어가야 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돌아서서 걸어가야 한다. 먼 곳까지도 아니다. 2년 후까지만 가면 된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 상상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

인류 역사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인공지능(AI)의 세상에서 우리는 50년 전의 낡은 사고와 가치관 논리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20, 30대가 살아갈 세상을 70, 80대와 그들을 등에 업은 권력이 결정하고 있다. 장하성 교수의 말처럼 세대간의 갈등과 소통단절로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는 청년들을 버려두고는 지역과 이념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오로지 자기 말만 잘 듣는 것을 소통으로 알고, 허울뿐인 숫자로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악법을 고집하고, 제도로 원천봉쇄를 해놓고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겠단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청년들에게 다시 희망을 돌려주겠다면서 기껏 외치는 것이 ‘컴백(Come back)’이고, 찾는 것이 퇴물이다.

상상일망정 드라마가 이 낡은 프레임을, 그것에 매달린 것들을 모두 부셔버리고 새로운 틀을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한심하게도 그 틀을 현실에서 만들 사람이 지금 여기에도 없고, 저 앞에도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누군가 응답하라, 2018”이라고 외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영화와 드라마에서처럼 세상이 바뀐다.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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