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새누리당이 이른바 ‘정체성’이 다른 의원들을 대거 내쳤다. 청와대가 내쳤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친이 좌장인 이재오 의원이 탈락하고 비박 의원들도 줄줄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고 지목한 유승민 의원의 거취는 잠시 결정이 미뤄졌지만, 유 의원이 원내대표를 맡은 시절 원내 수석부대표를 지낸 조해진 의원을 포함한 측근 대부분이 제외됐다. 박 대통령의 뜻에 일사불란하게 호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밖에 없다.

유승민 의원이 지난달 26일 ‘새누리당 20대 총선 공천신청자 면접’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고 지목한 유 의원의 거취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린다. ©포커스뉴스

눈 밖에 난 ‘배신의 정치인’들 줄줄이 공천 탈락

진박의 ‘결단’ 배경에 같은 진영 윤상현 의원의 ‘막말 파문’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비박 수장인 김무성 대표를 향한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낸 윤 의원이다. 진박 쪽에서 보면 윤 의원의 ‘취중진담’은 기특하기 그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형평성을 주장할 ‘순교자’가 아쉬웠던 마당에 그의 돌출행동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윤 의원의 공천 탈락은 정치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뻘짓’이 없었다면 비박을 대거 탈락시키는 프로세스는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언급한 것은 지난해 6월 25일이다.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비박, 더 직접적으로는 유승민 당시 원내대표를 표적으로 삼았다. 대통령은 19대 총선을 상기시키며 “정치적으로 나를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다시 읽어보니 대통령의 마음 속에서 비박의 대거 탈락은 기정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는 생물’이라는 격언처럼 이후의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 대표를 비롯한 비박 진영의 무기력은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오로지 ‘상향식 공천’으로 난국을 돌파하려 했지만, 그 유일한 무기가 실제 ‘전장’에서는 아무런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비박은 대책없는 느슨함에 휩싸여 있었던 반면 청와대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응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치적 텃밭’인 대구·경북(TK) 민심의 활용 방안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대구육상진흥센터에서 열린 스포츠 문화산업 비전보고대회를 마치고 나서 아이스하키 체험을 하고 있다.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 텃밭인 대구에서 지지세력 결집 정치 행보

박 대통령은 지난 10일 TK지역을 찾았다. 당장 ‘TK 의원 물갈이 및 친박 지원사격용’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청와대는 당연히 ‘순수한 경제 행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에 이어 대구국제섬유박람회와 스포츠문화산업비전보고대회가 각각 열린 대구전시컨벤션센터와 대구육상진흥센터를 잇따라 방문했다. 대구 전역을 누빈 것이다. 대구창조혁신센터는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다. 오후에는 안동·예천에 새로 들어선 경북도청 개청식에도 참석했다. 시·도지사협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 역시 고도의 정치적 셈법에 따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9월 7일 TK 지역 방문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전에는 대구에서 경제 재도약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구시의 추진 현황을 보고 받았고, 오후에는 경주의 신라 월성 왕궁 발굴 현장을 찾았다. 대구시의 보고를 애써 자신의 국회의원 당시 지역구인 달성군에 있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IGIST)에서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서문시장에도 들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오찬은 100명 남짓한 지역 주민과 진한 스킨십을 갖는 자리였다. 경주에서는 지역의 염원인 월성의 조기 발굴 및 복원에 속도를 내줄 것을 당부해 박수를 받았다. 역사 및 문화재 학계의 염원을 완전히 거스르는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무리수도 감수한 것이다.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TK 방문은 당연히 깊은 정치적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대구를 공통분모로 지난해 순방이 경주를 비롯한 경북 남부 지역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예천과 안동이라는 경북 북·동부 지역을 아우르는 성격이었다. 폭넓은 지역의 지지를 재확인한 것은 물론 대통령 스스로 용기를 배가시킬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4·13총선 공천에서 ‘노선 밖’을 떠돌던 비박 의원들에 ‘복수’할 수 있었던 것도 TK 지역의 변함없는 지지에 따른 자신감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텃밭 정치’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배신의 정치’의 주역인 유승민 의원 거취까지 무자르듯 결정하지는 못했다. 진박 진영 스스로 밝혔듯 자칫 전국적인 총선 구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석(末席)일 망정 대권후보 반열에도 올라있는 유 의원이다. ‘컷오프’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내에 다시 진입해도 도모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단기필마(單騎匹馬)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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