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프리미엄 코리아]

우리는 지금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금융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금융자본의 이동에 따른 환율 변동과 주가 등락으로 영향을 받는다. 누구도 금융자본이 행사하는 막강한 금력(金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신용거래는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금융의 역사는 대략 5000년이 넘는 셈이다. 그동안 인류는 금융을 이용해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고 자산시장에서 형성된 버블이 붕괴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기도 했다. 금융의 역사는 애증이 교차했던 역사라 할 수 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예일대의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 교수는 저서 ‘새로운 금융시대’에서 금융자본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금융자본주의는 1930년대 조지 W. 에드워드의 저서 ‘금융자본의 진화’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을 때부터 이미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공황 당시 비판가들과 대다수 시민은 금융 시스템을 비난했다. 군주의 자리에 자본가들이 바꿔 앉은 신봉건제도와 다름없다고 본 것이다.’

©픽사베이

예로부터 금융자본의 고유한 특성은 ‘군림하는 자’

쉴러 교수가 언급한 이런 내용은 금융자본에 내재된 고유한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돈을 빌려주는 자는 대부분 빌리는 자에게 군림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이런 현상은 왕이 돈을 빌리는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세기에 막강한 금력을 자랑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재정적으로 곤란에 처했던 유럽 여러 나라의 국왕을 대할 때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돈의 위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차이가 없었다. 오늘날 세계화와 정보화를 바탕으로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거대한 국제금융자본의 경우는 어떨지 가히 짐작이 간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1971년 8월 15일에 세계 금융사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달러의 금 태환(兌換)을 정지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안정적인 국제금융질서를 위해 1944년에 출범한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종언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출범 당시 금 1온스를 35달러와 교환해주고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고정환율제를 채택해 국제금융질서의 안정을 도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이미 영국의 파운드화로부터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어받은 달러의 위상은 이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고 미국은 세계 경제의 슈퍼 파워로 탄탄한 입지를 확보했다. 그런데 금 태환 정지 이후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미국은 브레튼 우즈 체제 출범 후 20여 년이 지난 1971년 왜 그런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향후 달러의 위상과 관련해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전후 유럽 부흥을 위해 실시한 ‘마셜 플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금융자본이 급부상하게 된 배경을 여기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픽사베이

1971년 미국의 금 태환 정지는 패권 유지하기 위한 구상의 첫 단추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이미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게다가 전쟁으로부터 산업 시설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기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나 프랑스 등 전쟁으로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이 필요한 나라들이 미국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필요로 했다. 마셜 플랜은 처음에는 무상으로 나중에는 유상으로 이들 나라들에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미국 제품을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른바 꿩 먹고 알 먹는 수지맞는 거래였다. 바야흐로 미국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이런 기류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독일과 일본이 전쟁의 피해로부터 완전히 복구해 세계시장에서 미국 제품에 대한 경쟁력을 회복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무역수지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당시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의 구현을 내걸고 재정지출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월남전에 깊숙이 개입함에 따라 전비지출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상당량의 금이 해외로 빠져나가자 국제사회에서는 달러의 가치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달러 가치의 하락을 방치할 수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극단적인 처방으로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 기반을 둔 브레튼 우즈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환율 변동폭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 리스크를 헷징(현물 가격변동의 위험을 선물의 가격변동에 의하여 상쇄하는 거래)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물, 옵션 및 스왑 거래와 같은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의 거래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금융상품들이 리스크를 헷징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현실은 이론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금융시장이 그러하다. 그래서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같은 투자전문가는 ‘효율적 시장가설’이라는 금융이론을 불신하고 대신 ‘재귀성 이론’이라 불리는 경험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이론을 과감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국제금융환경에서 파생금융상품의 거래가 증가하는 추세에 기름을 부은 것이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된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특히 금융부문에서의 규제완화는 파생금융상품의 거래를 촉진했으며 1999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폐지되면서 이런 추세가 한층 더 가속화됐다. 워렌 버핏이 대량살상무기라고 경고했던 파생금융상품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 이미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대재앙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 선언은 단순히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구상의 첫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당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우위가 있던 금융 부문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금 태환 정지 → 국제금융시장의 동요 → 파생금융상품의 활용 →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 → 달러 가치의 신축적 운용 → 자본수지 개선을 통한 쌍둥이 적자 해소 → 미 경제의 경쟁력 유지.

©픽사베이

미국, 2008년 금융위기로 위상 흔들려… 금융자본 우위 전략 계속 쓸 것

그런데 이런 시나리오에 예기치 않았던 변수로 등장한 것이 2008년 금융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금융시장을 통제하는 파워엘리트들은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자만에 빠졌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투자전략가인 제임스 리카즈(James Rikards)의 주장대로 연방준비은행을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들이 잘못된 경제 모델에 지나치게 의존했었기에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간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파생금융상품과 증권화(securitization)가 결합하면서 금융시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필자가 2008년 금융위기 관련해 보았던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인사이드 잡(Inside Job)’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개봉되었던 ‘빅 쇼트(Big Short)’라는 영화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증권화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이론적으로 증권화는 금융시장의 유동성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거래를 활성화시키므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증권화로 인해 금융거래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면 조그만 충격에도 눈사태 같은 대재앙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국제금융과 글로벌 경제에 정통한 몇몇 전문가들의 저서를 읽고 유투브에서 이들이 언론과 인터뷰했거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일련의 동영상을 보면서 2016년 이후 글로벌 경제 전망이 예상보다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글로벌 경제에서 금융자본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달러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장단기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맞서 중국은 위안화의 글로벌 위상을 높여 미래에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년 말 위안화가 10.92%의 편입 비율로 IMF가 발행하는 SDR(특별인출권) 통화바스켓에 편입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달러(41.73%), 유로화(30.93%)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편입 비율이다. 제임스 리카즈의 예측대로 향후 SDR이 달러 대신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어받게 된다면 위안화의 편입 비율에도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사실상 달러와 위안화의 기축통화 경쟁은 이미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포커스뉴스

우리나라, 미·중국 금융 주도권 경쟁으로 장기 경기침체에 빠질 수도

문제는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와 같은 처지인 한국경제의 미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2016년 이후 글로벌 경제 전망은 예상보다 훨씬 더 암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대한 금융자본은 여전히 과거와 유사한 방법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유린하면서 높은 수익률을 추구할 것이다. 한편 중국은 고정자본에 대한 과잉투자와 부동산 버블의 붕괴 위험 그리고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성장 둔화로 혼란에 빠져있는 듯하다. 국제금융전문가이자 중국통인 스티븐 로치(Stephen Roach)가 저서 ‘G2 불균형’에서 주장했듯이 미국과 중국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재균형화 전략’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로 인한 부작용은 글로벌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면 양국 간의 통화전쟁과 환율전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도래할 인구 절벽, 부채 감축 실패 등으로 인해 장기간 경기침체를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국제금융질서의 혼란과 실물경제의 침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면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지금부터 우울해진다. 그런데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한국 정부가 최선의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곧 있을 총선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국민의 안위가 달린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부의 기본 의무는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