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박찬욱 감독의 2002년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제목처럼 복수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다. 누가 대신 해도 안 되며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복수가 서로 얽히고, 그것이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고, 결국에는 모두가 연쇄사슬처럼 끔찍한 종말로 치닫는다.

여느 복수극과 달리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복수의 폭력성과 자기 파괴성을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정반대 정서인 건조한 시선과 침묵을 이어감으로써 인간 본성을 오히려 집요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모두에게 복수의 동기와 행위를 부여했고, 그것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용서도 없었으며, 그들의 복수에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장이식으로 누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장기까지 팔다가 사기당한 선천성 시각장애인 류(신하균)는 장기밀매단에게, 중소기업 사장인 동진(송강호)은 돈 때문에 딸을 납치해 죽게 만든 류와 그의 애인 영미(배두나)에게, 극렬사회주의자 단체 회원들은 전기고문으로 죽은 동료 영미를 대신해 동진에게 죽음의 복수를 했다.

박찬욱 감독은 애초 복수를 비판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복수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복수 자체, 복수할 수밖에 없는, 복수가 스스로를 전부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건조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연민조차도 차가웠다. 그렇다고 복수가 용서보다 어리석다는 것도 아니었다. 복수 역시 나의, 우리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더욱 아프고 처절했던 영화.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스틸컷

복수극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다

‘복수’의 영화와 드라마는 언제나 차고 넘친다. 얼마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마침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레버넌트’도 주인공인 사냥꾼 글래스가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동료를 끈질긴 추적 끝에 복수하는 이야기다. 원작(소설)은 ‘용서’로 끝을 맺지만 영화는 복수를 고집했다.

관객들은 용서도 바라지만, 복수도 바란다. 그만큼 이 세상에 ‘용서’보다는 ‘복수’가 만연하고, 누구나 마음 속에 지우지 못한 상처와 복수하고 싶은 대상 하나쯤은 감추고 있다는 얘기다.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에서의 복수가 ‘나의 것’은 아니지만,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준다.

복수는 자신이 타인 혹은 집단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 피해를 직접 되갚아주는 행위이다. 자신이 희생자이며, 배신당했고, 비판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다른 수단이 보이지 않을 때, 복수와 복수극은 더욱 강한 매력과 정당성을 얻는다. ‘눈에는 눈’식의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복수는 최후의 수단,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의 선택이란 점에서 약자의 것이다.

때문에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심은 인간에게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질병이나 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복수는 악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맥컬러프는 오히려 복수는 인간이 진화하면서 겪은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해결책이라고까지 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도, 동진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죄를 짓거나 배신을 한 사람에게 도덕과 의리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싶어서, 스스로 통쾌함과 자존감을 느끼고 높이고 싶어서 복수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강자, 권력과 무기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복수가 잠시 심리적 위안이나 자기과시는 될지 모르나, 어떤 보상이나 이익도 없다. 오히려 그로 인한 자기 환멸과 고통으로 불행만 가져올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로마서 12장19절)고 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스틸컷. 복수에 성공하고 “용서는, 너나 하세요”라고 말해도 마음에 평화가 깃들진 않는다.

“용서는, 너나 하세요”라고 말하는 세상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2005년 ‘친절한 금자씨’로 막을 내린다. 20세에 유아납치와 살인누명을 쓴 금자씨(이영애)는 13년 동안 복역하면서 아름다움과 친절함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고, 출소해서는 그들의 도움으로 복수에 성공한다. 금자씨에게 그들은 기꺼이 목숨도 내놓을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그들에게 금자씨는 은인이며 인자하신 여왕이다. 반면 누명을 씌운 자들, 배신자들에게 금자씨는 집요하고 잔인한 복수의 화신이다.

세상의 복수가 영화나 연극처럼 2부작, 3부작으로 모두 끝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복수의 불행은 그것이 언젠가, 반드시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온다는 것에 있다. 복수를 끝내고, 복수를 망각하는 길은 ‘용서와 화해’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는 없다. 용서야말로 너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고 세상의 모든 종교, 성현들이 귀가 아프도록 말해오지 않았는가. 소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용서해야 한다. 그래야 내 영혼이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은 복수는 나의 것이고, 용서는 너의 것이다. 나의 복수는 정당하니 그만둘 수 없다. 용서는 네가 해라. 금자씨가 자주 쓰던 싸늘한 한마디, “너나 잘 하세요”가 여기저기서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섬뜩하다.[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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