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4·13 총선 공천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가장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 말은 정체성(Identity)이다. 정체성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러한 성질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이다. 사전적 정의부터 철학적이어서 어렵고 모호하다. ‘동일성, 일치성’이라는 영어의 뜻풀이가 좀 더 쉬울 듯하다.

정체성 논란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 후보 선거사무실에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포커스뉴스

유승민·이재오는 원내대표 출신… 정체성에 안 맞는 것은 자가당착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남이 나에게 묻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나에게 묻는 것이다. 어느 후보가 어느 정당의 정체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잘 안다. 자신은 그 정당의 정체성에 맞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을 남이 안 맞는다며 내친 것이 이번 공천 파동이다.

새누리당에선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에선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정체성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정체성에 걸려 공천 배제된 대표적인 사람은 새누리당에서 유승민 이재오 후보, 더민주에선 이해찬 정청래 후보였다. 이들에 대한 공천배제는 유효해서 유승민 이재오 이해찬 후보는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정청래 후보는 수용했다.

새누리당은 김무성 대표의 ‘옥새반란’을 통해 두 후보의 지역구에 당의 후보를 공천하지 않음으로써 공천배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나마 교정하는 모양을 갖추었다. 더민주당은 이해찬 후보의 지역구에 당 후보를 전략공천해 초지를 일관했다.

후보등록 마감일 1시간 전까지 끌었던 새누리당 유승민 후보의 정체성 시비를 살펴보자. 당 원내대표시절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들의 귀에 거슬릴만한 발언을 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은 경제학의 원론에 있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 반박하는 모양새였다.

대통령의 방미성과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얼라(어린애의 사투리)’라고도 했다. 비서진들의 미숙한 처사를 나무라는 말이었으나 그런 비서를 임명한 대통령도 ‘얼라’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증세 발언보다 대통령의 진노가 더 컸을 것 같다.

친이계 좌장이라는 이재오 후보가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온 것은 훨씬 더 오래됐다. ‘독재자의 딸’ 발언에 이어 한일 위안부 협상 결과에 대해 ‘제2의 한일협정’ 운운한 것은 여당 중진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유 의원처럼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당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았던 사람을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고 하는 것부터 자가당착이다. 더욱이 여당으로서는 험지라고 할 수 있는 서울에서 5선을 했고, 야당에게 빼앗긴 의석을 기어이 되찾아 온 사람이다.

차라리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말을 했으므로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면 솔직하단 말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새누리당의 당헌당규에 모든 당원은 대통령의 발언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규정을 넣어야 할 터이니 그 또한 못할 노릇이다.

친노 배제를 내세운 김종인 표 정체성은 더민주에 약일까, 독일까? ©포커스뉴스

수권정당이 되기 위한 정체성이 친노 배제인가

더민주당의 정체성 논란은 수권정당이 되기 위한 문제다. 친노 배제를 통해 총선과 차기 대선의 승리를 이루는 것이 더민주의 정체성이라는 논리다. 이해찬 후보가 친노 좌장의 굴레를 쓰고 공천 배제된 이유다. 그 과정에서 총리, 교육부장관 시절에 낙인된 부정적인 이미지와 김 위원장과의 해묵은 정치적 구원(舊怨)도 들먹여졌다.

그러면 친노 배제가 더민주의 정체성인 것은 맞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여러 인기도 조사에서 늘 상위를 차지한다. 다른 모든 대통령들처럼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공과가 있다. 그 중에서 공은 챙기고 과는 버리면 되는 것이지 배척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막말 의원들을 공천배제 했을 때 김종인의 정체성에 여론의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셀프공천 파동으로 인해 그의 정체성은 허물어졌다. 사실 친노배제를 통해 총선승리와 수권정당을 이룬다는 논리의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노무현 식의 개혁정치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그런 취약한 근거와 논리적 기반으로 김종인 표 정체성은 총선 후 선거 승패와 관계없이 친노세력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김종인의 ‘셀프공천’ 파동에서 그런 조짐이 확연했지만 친노세력은 선거를 생각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한구 김종인 두 사람이 몰고 온 정체불명의 정체성 논란은 당내 분란을 가열시켰고,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키웠다. 둘 다 똑같으니 누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다. 투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이런 공천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