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4월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정당들은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절차를 분주하게 진행했고, 그 과정에 터져 나온 파열음이 귀를 따갑게 했다. 언론은 그 파열음을 시시콜콜하게,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프레임으로 확성시켰다. 모두 국민의 부와 행복을 내세웠지만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고자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친박과 비박의 권력투쟁, 야당의 분열과 분열된 야당 상호간의 이전투구, 대선을 염두에 둔 투박한 정치공세, 그런 상황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난무했다. 정치의 속내를 남김없이 보여준 과정이었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이다. 그러나 권력투쟁과 정치적 판단을 앞세워 국민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픽사베이

대표의 위기, 정당 민주주의의 위기

대의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의원은 한 명 한 명이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이다. 그러나 권력투쟁과 정치공학적 고려를 우선하여 구성된 의회는 국민 대표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의회와 정당을 비롯한 정치집단은 시민들의 요구와 의사를 반영하는 통로라기보다 차단하는 벽으로 작동하기 십상이다.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국가는 삼권분립 제도를 기반으로 한 권력분산마저 무산시키면서 이런 현상을 증폭시킨다. ‘대표의 위기’이자 ‘정당 민주주의의 위기’다.

대의민주주의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형식적 평등의 정당화, 지배 이익의 정당화, 배제의 정당화가 그것이다. ‘1인 1표’라는 형식적 평등은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정답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아서 나머지 대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대표성이 취약한 의회는 ‘보이는 의회’와 ‘보이지 않는 의회’로 이중 구조화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면서 한편으로는 특수 집단에게 합법적인 면죄부를 제공함으로써 지배이익을 정당화시킨다. 유권자는 ‘호갱’이 되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배제’를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환경운동 집단, 반전·반핵운동 집단, 페미니즘과 동성애자 집단,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집단 등을 배제시켜 영원히 ‘소수’라는 감옥에 묶어 놓는다.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국가는 국민 전체를 ‘소수’로 배제시켜 묶어 놓기도 한다.

지난해 9월 한 시민단체가 홍준표 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에 맞서 주민소환 청구서명활동을 하고 있다. ©홍준표주민소환운동본부 홈페이지

성사되지 못한 홍준표 지사 주민소환

직접민주주의 도입을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나라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한정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국민투표, 국민발의, 국민소환 등의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대상으로 한 국민소환 제도만 받아들이고 있다. 2014년 홍준표 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에 맞서 시민들이 ‘주민소환’으로 맞섰던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홍준표 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사안이 소송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법원은 홍 지사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경남 무상급식 문제가 ‘정책’ 사안이 아니라 경남도와 경남도교육청간의 ‘합의’ 사안이기 때문에 주민소환에 부칠 사안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도입 확대에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국가의 규모’라는 현실적 문제와 공공선과 충돌하는 ‘이기적 개인’이라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시민들의 개인적 의사를 집단적 결정으로 수렴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과 공공선을 지향하는 ‘각성된 시민’이라는 전제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그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르셀로나 엔 꼬뮤’를 가능케 한 데모크라시OS. 스페인 국민들은 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함께 선거공약을 만들고 수정해 상향식 정치참여를 이뤄냈다. ©데모크라시OS 홈페이지

바르셀로나 엔 꼬뮤, 오성운동, 오픈 미니스트리

작년 2월, 느슨한 선거연대체였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엔 꼬뮤’는 연대체 결성 4년만에 바르셀로나 시의회 제1당이 되었고, 바르셀로나 시장도 당선시켰다. 르 몽드는 이 사건을 ‘정치적 지진’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엔 꼬뮤는 구조적으로 온라인 플랫폼에 기반한 수평적 조직이다. 모든 제안과 결정은 온라인을 통한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거자금도 클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모았다.

선거공약은 5000명 이상이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참여해 집단적 수정과 투표를 거쳐 만들었고 주요한 정치적 결정은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총회에서 결정한다. 시민의 힘을 정치적 파워로 대중화하되 수평적 연대와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채택한 혁신적 정치방식이다. 그들의 슬로건은 ‘(시민들에게) 복종함으로써 통치한다(Governing by Obeying)’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도구는 ‘데모크라시 OS’라는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2013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오성운동(The Five Star Movement)’이란 단체가 창당 4년만에 제2당으로 도약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인터넷과 SNS를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이념 대신 이슈 중심으로 사안을 의제화시켰고, 당조직 대신 인터넷에 기반한 조직을 실현시켰다. 후보자 선거유세와 홍보도 인터넷을 통해서만 했다. 돈 안 드는 정치를 표방하며 국가의 선거보조금도 거부했다. 정당과 선거에 대한 고정관념을 통렬히 깨버린 혁신적 사례다.

2012년 개정한 핀란드 신헌법은 시민이 작성한 법안이나 제안이 6개월 이내에 5만 명, 유권자 1.2%의 지지를 받으면 국회에 자동 회부돼 토론과 표결에 부치도록 하고 있다. 시민들은 누구나 ‘오픈 미니스트리’라는 플랫폼을 통해 법안을 제안하고 클라우드 소싱 방식으로 지지자를 모을 수 있다. 시민발의 제도를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현실화시킨 것이다.

온라인 기반 협력적 의사결정 플랫폼인 ‘루미오(Loomio)’ 역시 직접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좋은 도구로 떠오르고 있다. ©루미오 홈페이지

시민 토론 플랫폼, 직접민주주의를 확장시키다

시민들이 동등하게 의안 논의에 참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까지 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 개발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대표적인 플랫폼이 뉴질랜드에서 시민토론 플랫폼으로 개발된 ‘루미오(Loomio)’다. 뉴질랜드 웰링턴 시의회, 하버드 대학, 위키피디아 재단, 스페인 신생 정당 포데모스가 의안 토론과 표결에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이 플랫폼에서는 누군가 의안을 제시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찬반표시를 하고 의견을 표명하면서 조율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정해진 기한까지 투표를 받아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찾아 낸다. 플랫폼이 개인의 의견을 집단적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루미오’ 외에 ‘브리게이드’, ‘폴리스’, ‘데모크라시 OS’ 등의 온라인, 모바일 기반 플랫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이들 플랫폼을 이용해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클라우드 소싱 방식으로 정치관계법 개정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8일 한 시민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를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시민 참여 없이 과세 없다’

‘데모크라시 OS’의 공동개발자 중 한 사람인 피아 만시니는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5세기에 개발한 정보기술(인쇄술)을 사용하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정치조직을 상대하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 형성의 기초였던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이제 ‘대화 없이 대표 없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신생 정당, 핀란드의 시민발의제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온라인과 모바일 기반의 플랫폼이 직접민주주의를 확대시키면서 정치를 혁신시키고 있다. 폐쇄적인 정치문화를 시민이 참여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민들이 정치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영역을 광범하게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선두에 서 있는 우리나라도 이런 플랫폼을 개발, 활용해 오프라인 상의 개개인들을 사회문제에 대한 가상 공론장으로 끌어들이고 협의와 조율을 거쳐 정책으로 실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사회문제에 대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민주주의 실현의 주체로 나서야 할 때인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이상요]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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