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아직 구성도 안 됐는데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아무리 정치를 혐오하고, 국회에 실망해 투표율이 낮아도 이미 ‘없는 것’은 결정됐다.

혹시 유권자들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뜬자들의 도시’에서처럼 모두 백지투표를 해 선거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면 모를까. 그러나 이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에나 나오는 상상일 뿐. 그러니 20대 국회에 ‘문화’는 없다. 비례대표를 보면 결코 억지가 아니다.

애초 20대 국회 비례대표는 그 모양새부터 찌그러졌다. 19대 국회 임기 말에 여야가 지루한 싸움으로 지역구 조정을 미루더니, 부랴부랴 자기네 밥그릇 챙기기로 끝냈다. 희생자는 비례대표였다. “제발 국회의원 좀 줄이자”는 국민의 바람을 무시하고 지역구를 오히려 7개 늘렸다. 그 바람에 비례대표만 54석에서 47석으로 줄었다, 그것으로는 당에 줄선 사람, 은혜 갚아야 할 사람, 큰 줄 잡고 내려온 사람 챙기기에도 모자랄 판이다.

11일 국회에서 20대 의원 당선자들이 착용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다. ©포커스뉴스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비례대표

아니나 다를까, 최종 명단을 보면 취지가 무색할 정도다. 비례대표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선출된다. 최소 3%이상이어야 하며, 총 득표비율에 따라 47명을 나눠가진다. 취지는 비록 지역구 선거에서는 후보가 1위를 못해 떨어졌지만, 그것을 사표(死票)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정당에 대한 투표를 동시에 실시해 의원을 추가로 선출하는 것이다. 후보가 마음에 안 들면 정당은 딴 곳에 투표해도 된다.

또다른 목적은 상대적으로 지역구 선거에 출마도, 당선도 어려운 계층과 분야의 대표자를 국회의원으로 영입해, 국회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높여보자는 것이다. 여성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취지와 달리 지금까지 역대 정당들은 비례대표가 마치 보너스라도 되는 양, 멋대로 끼리끼리 나눠먹었다. 심사를 거치긴 하지만 기준도 없고, 있어도 유명무실이다.

새누리당은 20대 국회 비례대표 1번으로 IT전문가인 여성 송희경을 뽑은 것을 자랑한다. 그 하나뿐이다. 다음부터는 몇 명을 제외하면 줄줄이 정당인, 교수, 노동운동가이다. 크게 보면 전부 정치인 또는 정치 하고 싶어 안달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사가 많은 것도 개운치 않다.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 2번을 떡 차지해 여론의 화살을 맞고 물러선 더불어민주당도 오십보백보다. 당 사람, 교수, 노조 간부가 앞자리를 차지했다. 국민의당도 비슷하다.

새누리당(위)과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명단 일부. 비례대표 도입 취지에 맞는 전문가는 물론 문화계 인사도 보이지 않는다. ©중앙선관위

새누리당조차 문화계 대표 한 명 없어

세 당의 비례대표 어디에도 ‘문화·예술계 대표’나 ‘문화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이 유일하게 26번에 김규민이란 영화감독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정당투표에서 압승을 거두지 않는 한 그의 국회입성은 불가능하고, 영화계에서 존재감이 약한 탈북감독인 그에게 굳이 대표성을 부여하자면 문화예술보다는 북한과 탈북자의 인권과 삶이 더 맞을 것이다. 19대 국회 때 이자스민씨가 공무원이 아닌 결혼이민자, 다문화 가정을 대표했듯이.

그나마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아예 없다. 19대에서 새누리당은 김장실 전 문화차관과 이번에 경기 구리시에 출마한 박창식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장, 민주통합당이 도종환 시인을 비례대표로 뽑은 것과는 대비가 된다. 19대 때 나란히 2번으로 배정하면서 그렇게 요란하게 선전하던 장애인 대표도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은 비례대표 당선자 수도 적고, 문화보다는 급한 경제로 당의 사활을 걸고 있으니 그렇다 치자. 새누리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명색이 집권여당이고, 지금 이 정부가 국정기조로 삼아 목숨 걸고 추진하려는 것이 ‘문화융성’임을 모르고 있는 건가. 입법과 예산으로 그것을 밀어주고, 독려해야 할 집권 여당이 “나 몰라라”하는 격이다.

지역구 의원 중에 문화전문가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할 텐가. 아서라. 국회에서 문방위원 한두 번 했다고 전문가라고 우기지 마라. 소가 웃는다. 문화예술의 품격이, 문화의 융성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듯, 연극 몇 편 보고 관련법 하나 제안하고 문화에 대한 어설픈 칼럼 모아 책 한 권 냈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월20일 중국 베이징에서 국립무용단의 한국 전통춤 공연을 하고 있다. 문화를 공장에서 물건 찍듯 다루는 환경에서 문화융성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문광부

‘문화국회’ 없이 ‘문화융성’도 없다

문화융성, 문화를 통한 창조경제가 그렇게 절박하고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소위 ‘진박’들은 무얼했나. 비박 몰아내기에만 정신 팔려 비례대표는 신경도 쓰지 않았거나,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다. 맨 날 안팎으로 싸움 밖에 모르는 국회, 20대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문화융성은 정부 혼자 추진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도 돈과 제도 없이는 어렵다. 국회가 예산과 입법으로 밀어주어야 한다. 혹시 새누리당이 지금의 정부가 1년 10개월 밖에 안 남았으니, 진박들까지 돌아서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또 모를까.

사실 문화는 국회에만 없는 것은 아니다. 역대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결국 문화는 뒷전이고, 문화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문화는 우아한 패션쇼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걸핏하면 가까운 정치인,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측근을 장관에 앉혔다. 물론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자리를 탐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문화에 문외한을 차관으로 내려 보내 문화를 공장에서 물건 찍듯 몰아 부친다. 그러니 ‘문화융성’이 내용보다는 포장만 자꾸 커지는 것이다.

문화에 관한 한 우리는 늘 프랑스를 부러워한다. 1959년 드골이 세계 최초로 정부에 문화부를 만들고 앙드레 말로를 장관에 앉힌 이래, 프랑스는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에게 문화를”이라고 외치면서 ‘문화국가’를 만들었다. 세계적 명성의 문화예술인들이 장관을 맡아 문화부를 역전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문화 자부심과 문화융성과 문화향유를 위한 일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의회를 한마음으로 묶었다. ‘문화는 정치다’를 쓴 장 미셸 지앙은 “프랑스에서 문화와 예술은 명실공이 사회구성원 모두를 이롭게 하는 공공재”라고 했다. 문화다원화, 문화민주화, 문화산업화 정책와 더불어 문화정치의 연속성과 전문화 덕분이다. 우리는 언제 그렇게 되나.[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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