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신세미

지난해 늦가을 마당에 파묻었던 튤립 구근들이 언 땅에서 겨울을 나고 이제 막 붉고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동네 골목의 담벼락 너머 벚꽃, 목련, 진달래, 개나리는 어느새 절반이상 꽃을 떨궜다. 생태학자가 아니라도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이른 봄부터 시간 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꽃을 피우던 봄나무들이 요즘은 거의 동시에 화르륵 꽃을 피우곤 확 져버려 봄꽃 즐기는 시기가 너무 짧아 아쉽다고.

이즈음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화제는 봄꽃 이야기다. 유독 한순간 피었다 지는 찰라적인 봄꽃을 좀 더 진하게 즐기기 위해 꽃구경에 나선다. 지역별 벚꽃축제 일정을 남에서 북으로 거스르는 봄 야유회를 꿈꾸고, 몇몇은 편의점 삼각김밥 샌드위치라도 챙겨선 집 직장 부근의 벚꽃 군락지와 전망 좋은 곳을 찾는다. 봄꽃놀이 열기는 고속버스뿐 아니라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꽃송이가’가 흘러나오는 도심 버스에도 가득하다. 누군가는 “화사한 이 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겠냐”, “꽃피는 봄이면 이제 내 곁에 없는, 떠나버린 것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린다”며 10인10색으로 봄을 경배한다.

해남 미황사 자하루미술관에서 마련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 전시회 포스터. ©미황사

예술과 사색에 빠져들게 하는 천년고찰 미황사의 자하루미술관 개관전

봄나들이 인파로 붐비는 남도 사찰에는 현대미술의 꽃이 활짝 피었다. 한반도 남쪽 끝, 전남 해남 달마산 ‘천년 고찰’ 미황사에 새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대웅전 건너편의 자하루가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자하루미술관 개관기념전 ‘땅끝 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전이 지난달 말부터 5월 말까지 두달여 이어진다. 불교 관련 예술품을 관리 전시하는 사찰의 성보미술관과 다르게, 전통문화와 현대미술이 소통하는 공간이다.

개관전답게 인도의 불상과 경전이 전해진 사찰의 창건 설화를 다룬 홍선웅 박방영 씨의 작품이며, 이인 씨의 나무 불상과 프레스코 기법으로 만든 오원배 씨의 불화도 있다. 신태수 안윤모 씨는 이른 봄 절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 숲의 장관을, 이종구 씨는 한밤 달빛아래 달마산 불상들이 반디불이처럼 빛나는 작품을 내놨다.

미황사와 행촌문화재단이 마련한 자하루미술관 개관전에는 지난해 이 절에 머물며 주변 풍광의 영감을 담아낸 작가 32명의 신작 60여점이 전시 중이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산사에서 접하는 현대미술의 감동도 각별하다.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도 산사에서 예술과 더불어 사색과 성찰의 시간에 빠져들게 된다.

전통 사찰의 현대미술 기획전은 불교와 미술의 만남을 넘어 전통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지는 문화예술 이벤트로 기대를 모은다. 종교적 공간, 신앙의 장소인 사찰에 현대미술이 더해지고 당대를 담아내는 미술 공간으로서 사찰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들이 길에 자연과 더불어 다양한 현대미술을 만나고 명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 같은 기획전은 예술가들이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창작세계를 일궈나가는 기회이기도 하다.

‘2013 해인 아트 프로젝트’에서 천경우 작가가 선보인 ‘고통의 무게’ 작품. 작가는 돌이 채워진 붉은주머니들을 통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삶 속에서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형상화했다. ©해인아트프로젝트 홈페이지

무각사, 해인사, 실상사, 전등사도 현대미술 아우르는 너른 문화공간으로 거듭나

사찰들이 종교를 초월해 동시대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며 문화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기간이면 전시공간으로 한몫 하는 광주 도심의 무각사는 지난 2013년부터 로터스갤러리를 운영중이다. 국내 유명작가와 지역 신인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이 곳은 일반인에게 도심 속 문화적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이밖에 합천 해인사는 2011, 2013년 해인 아트 프로젝트, 남원 실상사는 2014년 지리산프로젝트를 통해 전통 사찰로서 자연, 현대미술과의 조화를 모색했다. 강화도 전등사는 2012년 현대식 공간으로 법당 무설전을 신축하면서 현대미술이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공간인 서운갤러리를 갖췄다.

서구 여행 때면 가톨릭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성당을 찾아 그들의 미술 문화에 다가서듯, 사찰이야말로 우리의 예술 명소로 부족함이 없다. 큰 돈 들여 새로 전시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도 이렇게 자연 속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사찰들이 현대미술의 장으로도 그 너른 폭을 드러내고 있다.[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퇴직 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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