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부산항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국적선사의 쾌속선 오션플라워호(號)를 타고 두시간 남짓이면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의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에 닿는다. 간논지(觀音寺)는 이곳에서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시간 반쯤 달려야 나타난다. 2012년 10월 한국 절도단이 훔쳐온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던 절이다. 오래된 사찰의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 간논지는 일반 주택과 다름없어 보인다.

서산 부석사가 일본 측과 소유권 분쟁을 치르고 있는 금동관음보살좌상 ©대검찰청

절도단이 훔쳐온 일본 간논지 관음보살좌상··· 외교 문제로 떠올라

마당에 관음보살좌상을 일본말, 한글, 영어로 각각 소개한 안내판이 보인다. ‘몸체 내부에서 부장품과 함께 중국 원(1330년) 명의의 결연문이 발견되어, 고려말 만들어진 불상임이 판명됐다’는 대목은 그런대로 사실에 부합한다. ‘고려국(高麗國) 서주(瑞州) 부석사(浮石寺)에서 계진(戒眞) 등 32명의 소원으로 조성됐다’는 내용도 그렇다. 문제는 서주 부석사라고 써놓고 굳이 괄호안에 ‘현재의 경북 영주군’이라고 잘못 부기해 놓았다는 것이다. 말미에는 보살상이 1973년 나가사키현 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밝혀놓았다.

간논지를 돌아보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일본도 관음보살상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높이 50.5㎝인 이 불상이 간논지의 본존불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말로 ‘관음사’로 읽는 간논지는 글자 그대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이다. 관음보살은 바닷길의 안전을 보살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쓰시마라는 섬 지역의 특성상 부석사 관음보살의 ‘영험’에 의지한 지역민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관음상이 없다면 더 이상 간논지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부석사 관음보살좌상 처리 문제는 가뜩이나 얽히고설킨 한·일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는 외교 문제로 떠올랐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인 절도단이 쓰시마에서 훔쳐온 불상은 간논지 보살상과 가이진진자(海申神社)의 통일신라시대 여래입상이었다. 가이진진자 여래입상는 8세기 금동불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명품이지만,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빼앗아 간 것이라는 증거도 없어 지난해 일본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관음보살상은 서산 부석사부터 “명백하게 약탈해 간 성보(聖寶)”라며 ‘반환 절대 불가’의 자세를 굽히지 않는다.

약탈 가능성 높지만 일본은 교역으로 들어온 불상 주장

실제로 서산 부석사에 가보면 약탈의 정황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부석사가 자리잡은 해발 351.5m의 도비산은 천수만이 내륙으로 깊숙히 파고 든 모서리에 해당한다. 부석사에 오르면 천수만 일대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부남호를 막기 전에는 절 아래 드넓은 평야도 모두 바다였다. 바닷가의 솟은 산이라는 전형적인 관음보살 상주처(常住處)의 입지다. 부석사 관음보살은 천수만 어민들에게 ‘해상 안전의 아이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와는 간논지의 안내판이 혼동을 일으킨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실제로 인연이 깊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영주 부석사의 창건 설화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의상대사의 뱃길을 선묘라는 낭자가 바다의 용이 되어 보살폈다는 내용이다. 서산 부석사도 선묘 설화를 창건 설화로 삼았다. 큰 법당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 앞에 안양루를 세웠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여러모로 영주 부석사를 모범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보살상 결연문에 간논지 안내판에는 담겨있지 않은 ‘당주 관음’(堂主 觀音)이라는 구절이 담겨있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관음보살상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 아니라 독립된 법당의 주존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당주 관음의 유고(有故) 당시 서산 부석사는 관음도량의 성격 또한 짙은 절이었다. 천수만, 나아가 서해 바다와 싸워 삶을 이어나간 서산 사람들이 생명을 의탁하던 존재가 이 관음보살상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예배 대상을 외국의 작은 절에 선물로 주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현실성 떨어지는 소설에 가깝다.

관음보살상은 ‘간논지가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2013년 우리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따라 문화재청이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2월 26일 이후 가처분 취소 신청이 가능해졌고, 일본 측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간논지는 최근 정부에 조기 반환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쓰시마에는 조선과 교역으로 들어온 불상이 많다’며 약탈품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청도 결코 작지 않은 반환 압박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봉안위원회’는 4월 중 ‘유체동산 반환청구소송’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일 불교계가 평화적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했으나, 최근 일본 내 부적절한 여론이 확대되고 있어 소송을 하게 됐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봉안위원회는 이름처럼 ‘제자리 봉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일본 측과 대화로 견해차를 줄이기에는 처음부터 의기(義氣)를 제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외교적 노력이 중요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없이 사실상 3년 동안 시간만 보낸 느낌이다.

만일 당신 집에 도둑이 들어 귀한 물건을 훔쳐갔는데 오랜 시간 뒤 다른 장소에서 그 물건을 발견했다. 당신은 그 물건이 내 것이라 주장했지만 주인은 “도둑맞은 증거를 대라”고 소리친다. 부석사 관음보살을 둘러싼 한·일 문화재 전쟁은 이와 비슷하다. ©픽사베이

문화재 반환에 악영향 미칠 수도··· 대화와 타협에 나서야

소송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양쪽은 ‘정당하게 넘어갔다는 근거를 제시하라’거나 ‘무력으로 빼앗아갔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맞설 것이다. 이쯤 되면 법철학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쪽은 불복할 수 밖에 없다. 유네스코 불법문화재 반환협약 조차 ‘도난 문화재는 본래 소장처에 소유권이 있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지만 ‘협약이 체결된 1970년 이후 발생한 사건에만 적용된다’는 단서 조항 또한 버티고 있다. 제국주의시대 문화재 강탈에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서둘러 관음상을 일본에 돌려주는 결정을 내려 국민의 마음을 멍들게 해서는 안된다. 봉안위원회도 소송으로 관음상을 돌려받겠다는 기대는 잠시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판결은 ‘한·일 문화재 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더 많은 문화재의 반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와 봉안위 모두 일본과 ‘대화와 타협’을 본격적으로 벌일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용도로 소송기간을 활용하기 바란다. 입수 경위야 어떻든, 수백년 동안 한 절의 본존 역할을 한 관음상이다. 간논지가 새로운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궁색하기만 한 절집도 정비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모색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모금에 기꺼이 참여할 국민은 적지 않을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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