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에서 쓰는 편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카메라와 지갑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도착해서 맨 먼저 들은 말이 “지갑을 조심하라”였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세계의 예술과 문화를 선도한다는 파리에서 지갑부터 챙겨야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현실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펠탑에 가든 몽마르트 언덕에 가든 우선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지갑의 안전이었습니다. 그만큼 관광객의 지갑을 탐내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배낭과는 별도로 작은 가방을 하나 사서 지갑을 넣고, 그 가방을 옷 안에 메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어리바리하게 보이는 키 작은 동양인이야말로 좋은 타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지난달 13일 충남 논산여중 정문에서 포돌이·포순이로 변장한 경찰관들이 등굣길 학생에게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우정사탕 나누기’ 캠페인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치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힌다. ©충남지방경찰청

사실 파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라면 어디든 불안합니다. 로마나 이스탄불의 소매치기가 ‘악명’을 떨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파리에서 익힌 경계심은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도 경계를 완전히 풀 수 없었습니다. ‘국제적인’ 소매치기들이 어디에 출몰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행자로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여행은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익명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과정인데….

자연스럽게 내 나라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치안만큼은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 외국 여행자가 크게 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갑이 불안해서 명동을 걷지 못했다거나, 남대문 시장에서 마음 놓고 쇼핑을 못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지갑을 지킬 수 있는 나라라는 뜻이지요. 물론 여전히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핸드백이 열리고 주머니가 속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지갑을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옷 속에 감추고 다닐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범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저 혼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외국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자랑할 만한 것은 치안뿐이 아닙니다. 화장실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 역시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도시에서는 화장실을 써도 된다는 표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유럽 여행을 하면서 소변을 보기 위해 시간도 되기 전에 밥을 먹고 차를 마신 경우도 제법 있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어떻고요. 우리나라처럼 휴게소가 발달했거나 화장실이 개방된 나라는 흔하지 않습니다. 북유럽 쪽으로 가면서 동전을 넣어야 화장실을 쓸 수 있는 휴게소가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하나 더 들까요? 우리나라는 ‘숙소’ 수준도 발군입니다. 특히 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곧잘 러브호텔이라고 불리는 모텔이 한몫 하고 있지요. 제 주머니가 가벼운 탓에 싼 곳을 찾은 것도 원인이겠지만, 유럽의 호텔은 시설이 형편없는 곳이 많습니다. 다리 네 개가 멀쩡한 침대만 있어도 감지덕지할 때가 있지요. 샤워시설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기숙사라는 뜻의 도미토리가 아닌, 호텔이라는 이름의 숙박시설에서 말이지요. 가격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하루 숙박비가 10만원을 넘기는 건 예사니까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모텔은 천국입니다.

그밖에도 자랑거리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지하철로 상징되는 도시 교통망 같은 것이지요. 서울의 지하철 역시 ‘지옥철’이라는 악명도 얻었지만, 비교적 잘 발달 돼 있습니다. 넓고 쾌적한 편이기도 하고요.

경남 통영시는 공중화장실이 부족해 불편을 겪는 관광객을 위해 민간 화장실을 개방하고 있다. 화장실 역시 외국보다 한국이 더 좋은 것들 중 하나다. ©통영시

마침 얼마 전 ‘인사이트’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한국이 의외로 살기 좋은 나라인 이유 6가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의외로’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약간 엉뚱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역시 맨 먼저 꼽은 것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치안’이었습니다. 기사는 역설적인 질문으로 안전을 강조했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 집에 가는데도 귀에 이어폰을 꽃은 채 노래 들어도 탈나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치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한 저는 이 질문에 백 번 공감합니다.

그밖에도 매체에서는 ‘수많은 나라가 배우려는 의료보험체계’나 ‘속 터질 일 없는 인터넷 속도’ 등을 살기 좋은 나라의 조건으로 꼽았는데,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는 항목들이었습니다. 결국 찾아보면 우리에게도 내세울 만한 것들이 꽤 많다는 것이지요. 자랑할 건 해야지요. 현실은 안중에도 없는 턱없는 자부심도 문제지만, 과도한 열등의식 역시 스스로를 망가뜨린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몇 가지 사례로 젊은이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헬조선’을 덮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례들 자체가 내일의 희망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거니와, 문제점이 그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다만 모든 것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좌절하는데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작은 것에서부터 긍정적 요소를 찾아보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희망은 누가 쥐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파종하고 키워나가는 것이라는 진리 역시 또 한 번 강조하고 싶고요.

이제부터는 나라꼴이 한심해서 먼 나라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긍정적인 것을 하나씩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안정된 치안, 편하게 쓸 수 있는 화장실, 안락한 숙소, 빠른 인터넷….[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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