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이번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참패를 보고 박근혜 대통령이 받았을 충격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대통령은 4·13 총선 1년 전부터 투표 당일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선거에 관한 자신의 의지와 희망을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일관되게 야당을 심판하고 여당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4월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제1투표소에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청와대

박 대통령, 작년 6월 ‘배신의 정치’ 포문 이후 줄곧 야당심판 요청

박 대통령의 총선관련 언급은 일찍이 작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선거개입 발언이었지만 ‘선거중립 의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작년 6월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배신의 정치 심판론’을 내세워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으로, 선거 관련 최초의 발언이었다.

11월 국무회의에서는 “진실한 사람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같은 TK 출신이라도 ‘진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서 선택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때부터 ‘진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신조어들이 만들어졌다.

12월에는 무려 세 차례나 선거관련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가 명분과 이념 프레임에 갇힌 채 기득권 집단의 대리인이 됐다.(12.8 국무회의) ▲국회의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돼 버렸다.(12.14 수석비서관 회의) ▲국회 비협조로 노동개혁이 좌초되면 역사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12.23 핵심 개혁과제 성과 점검회의) 차마 드러내 놓고 야당을 거명하진 못하고 싸잡아서 국회를 때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었다.

새해 들어서도 그의 발언은 멈추지 않았다. “20대 국회는 최소한도 19대 국회 보다 나아야 한다.”(1.13, 대국민 담화 및 연두 기자회견) “(국회의 직무유기를) 국민께서 직접 나서주시기 바란다.”(3.1절 기념식) 이어 미국, 멕시코 국빈방문(3.30~4.5)을 마치고 귀국한지 이틀 만에 충북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서는 예의 ‘20대 국회 변모론’을 강조하기도 했다.

마침내 선거 하루 전인 12일, 박 대통령은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 석상에서 “민생안정과 경제 활성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회가 탄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누가 봐도 새누리당을 지지해 달라는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즉각 선거법 위반이라며 문제 삼았지만 청와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난달 23일 새누리당 탈당 및 무소속 출마 기자회견을 갖는 유승민 의원 뒤로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보이고 있다.©포커스뉴스

‘선거법 위반’ 개의치않아… 참패 후에도 민의와 동떨어진 ‘여왕 화법’

선거 당일(4.13) 오전에는 위아래 빨간 옷을 입고 투표장에 나와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빨간 색이 새누리 당의 로고 칼라(Logo color)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의 이날 옷차림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20대 총선에 거는 박 대통령의 기대가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이날의 패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간절하게,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면서 야당을 심판하고 여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건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국민은 대통령의 바람대로 야당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 대통령을 심판했다. 총선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 집착을 보였지만 돌아온 건 집권 여당의 전례 없는 참패(慘敗)였다. 새누리당 원로들까지도 ‘선거결과는 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표 5일 후에서야 내놓은 박 대통령의 총선관련 첫 반응은 민의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대국민 담화나 특별 기자회견 같은 의전상의 격식은 차치하고 국무위원도 아니고 매일 만나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 앞에서 특유의 화법으로 피력한 그의 발언은 또다시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아직도 미몽(迷夢)에 빠져 있는듯 보였다.

“20대 국회가 경제와 민생에 매진하는, 일하는 국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정부도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와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의 결과는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고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사명감으로 경제발전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마무리 하겠다”고 말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최소한의 반성이나 사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자기는 선거결과와 관계없다는 듯 3인칭 화법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20대 국회에 이렇게 바란다’면서 마치 지시하듯 말하고는 ‘그러면 나도 협력해 주겠다’며 여왕식 어법을 구사했다. 과연 박 대통령이 지금 20대 국회에 이렇게 지시하고 주문할 수 있는 처지인가?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각 정당별 의석수. ©포커스뉴스

여소야대 정국… 13대 총선 때와 닮아

대통령이 임기 후반을 순탄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집권 여당이 과반수 안정의석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또 총선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도 있는 만큼 비중이 크고 중요한 선거다. 하지만 자신의 재임 중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에 이토록 집착을 보인 역대 대통령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4·13 총선은 여소야대 정국과 다당제 정립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16대 총선보다는 1988년의 제13대 총선(4·26)과 닮아 있다. 1노3김(一盧三金)으로 상징되는 각 정당구도 역시 지금의 새누리·더민주·국민의당·정의당과 흡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인 13대 총선에서는 ▲집권 민정당 125석 ▲DJ의 평화민주당 70석 ▲YS의 통일민주당 59석 ▲JP의 신민주공화당은 35석을 얻었다. 야3당이 164석을 얻어 여당 보다 39석이나 많았다. 공교롭게 이번 4·13 총선에서도 야3당을 합친 의석수는 164으로 나왔다. ▲더민주가 123석으로 제1당을 차지했고 ▲122석을 얻은 새누리가 제2당으로 밀려났으며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등을 차지했다.

임기를 1년 10개월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여소야대 정국을 맞이한 박 대통령이 이를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국민은 주시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늪에 빠져 있는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다각적인 자구책을 강구할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 군과 경찰, 청와대 비서실 측근들, 자신의 수첩에 있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백방으로 묘책을 찾아 나설 것이다.

대통령은 심지어 이번 선거법 위반 수사를 통해서라도 여소야대를 바꿔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난 민심은 옛날처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북풍조작도, 종북세력 척결도, 공안정국 조성도 다 불신 받는 카드가 돼 버린 지 오래다. 그런 것들로 국민들의 마음을 휘저어 보려는 발상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들이 실컷 애용했던 수법으로 지금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당치 않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언론사 보도·편집국장과 오찬간담회를 개최한다. 4·13총선을 겪으며 지지율이 급락한 박 대통령이 언론인과의 간담회를 통해 어떤 반전을 꾀할 지 주목된다. 사진은 2013년 4월 개최한 언론사 보도·편집국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는 박 대통령. ©청와대

노태우·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야당과 상생의 정치 구현해야

박 대통령은 일찍이 여소야대 정국을 슬기롭게 극복해 낸 노태우·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한다. 그들은 야당과 대화하고 존중하며 협력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국민에게 상생의 정치를 구현해 보였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야3당 대표들과의 영수회담을 정례화하고, 이를 통해 서울올림픽 추진 등 국가적인 의제를 협의해 나갔다.

이듬해인 1990년 1월에는 민정+통일민주+신민주공화의 3당을 합쳐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그 후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했고,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는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치지형에서 임기를 시작했으나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민자당 정권도 재창출할 수 있었다.

이제 박 대통령은 평소 규탄하듯 비난해 왔던 국회, 특히 야당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다. 4·13 총선 직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한 두 줄짜리 논평이나 그 닷새 후 박 대통령의 공식발언 등을 보면 여소야대가 가져올 파장이 어떤 것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불과 40일 후면 펼쳐질 여소야대 정국을 슬기롭고도 생산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전략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을만한,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 하나쯤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장기적인 미래비전이 담긴 국가차원의 프로젝트라면 좋을 것이다.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4년 전 대선 당시의 공약 가운데 딱 두 가지만 끌어내서 실현해도 큰 성공일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같은 것 말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이 공약들을 사실상 폐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국민들은 여기에 큰 기대를 걸고 표를 던졌지만 약속이 달라지자 민심은 이반하기 시작했다. 더민주로 간 김종인, 국민의당으로 간 이상돈의 변신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16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협력기업 임직원과 가족들이 ‘개성공단 평화대행진 집회’를 마치고 통일대교로 향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임기 동안 경제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에 집중해도 모자랄 것

박 대통령은 경제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두 가지 프로젝트에만 주력해도 남은 임기가 모자랄 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문제라서 더욱 그렇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얽히고 꼬이기 시작한 남북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 둬선 안 된다. 박 대통령은 꽉 막힌 남북간의 언로(言路)부터 열어야 한다. 가장 큰 언로는 두 정상간의 언로일 것이다. 물론 남북정상회담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한 걸음도 나가기 어려운 것이 남북문제의 현실이다.

박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2년 후인 2002년 5월 3박4일간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대좌한 보기 드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정상회담을 비롯한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한다면 대다수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다. 먼저 야3당부터 이를 적극 환영하고 나설 것이다.

박 대통령은 또 2014년 연두 기자회견 때 ‘통일 대박’ 발언으로 통일문제에 관한 범국민적 기대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해 4월에는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발표했다. ‘드레스덴 선언’으로 알려진 이날의 발표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구축에 필요한 3가지를 북측에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남북 민생 인프라 공동구축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해결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 등이었다. 기존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보다 구체성을 띤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남북문제 전반에 관한 개념적인 이해수준이 이명박 대통령보다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다.

유엔 대북 제재가 강도 높게 진행 중이고 개성공단이 폐쇄된 현 상태는 분명 위기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이 이제부터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 구상에 온 몸을 불사른다면, 그래서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대폭 완화되고 인적·물적·통신상의 3통(通)이 이뤄진다면 그야말로 여소야대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을 가져오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통일로 가는 결정적인 기초를 닦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전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통일외교팀장,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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