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희 아이브인베스터스 대표]

최근 양적완화에 대한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양적완화란 2001년 일본은행이 장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처음 시행한 것으로, 중앙은행이 발권기능을 동원하여 시중에서 채권을 매입하는 등 자금을 직접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찬성론자들은 국가경제가 위기상황이라, 통화당국인 한국은행이 경제의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 공급하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경제상황이 그렇게 위중한 시기도 아니고, 금리인하 등 다른 수단도 있을 뿐 아니라, 자산버블 위험, 형평성 문제와 자본유출 등 부작용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다. 양적 완화는 이론적으로는 통화가치의 하락으로 연결되어 국민 전체가 이해당사자가 된다. 따라서 타당성과 적법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2015년 시중 통화량 추이(위)와 2012~2015년 연간 시중 통화량 추이. 현재 유통되는 통화량은 경제규모와 비교할 때 부족하지 않다. ©포커스뉴스

시중 통화량(M2)은 2241조원으로 충분

한 나라의 통화는 경제시스템 내에서 실물 및 금융경제활동과 함께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공급되며, 공급된 통화는 다양한 경로로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행은 통화량 조절로 거시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주된 정책목표인 독립적 조직이며, 금융통화위원회를 월 1회 개최하여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경제주체들은 결정된 금리를 기준으로 저축과 투자 등 의사결정을 하고, 이에 따라 총통화량이 조절되는 구조이다.

한국 경제에서 유통되는 통화량은 경제규모와 비교할 때, 실물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하기에 부족한 양이 아니다. 대표적 통화지표인 시중통화량(M2)을 기준으로 보면 2015년 말 2241조원인데 이는 GDP의 1.47배에 달한다. 과거 M2/GDP 추이를 살펴보면, 1987년 0.59배, 1997년 0.98배, 2007년 1.22배 등 통화량이 실물경제의 확대규모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속 증가해 왔다. 경제가 활황이던 1980~90년대에도 GDP대비 통화량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경제 불황의 원인이 통화량 부족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3일 독일에서 열린 제16차 한·중·일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양적완화를 추진 중인 정부와 ‘돈 찍어내기’가 부담스러운 한은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다. ©기획재정부

통화 유통속도 급격히 떨어져

전통적인 화폐이론인 화폐수량설에 따르면, MV=PT(M:통화량, V:유통속도, PT:명목소득)로서, 통화량과 유통속도가 명목소득(GDP)을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즉, 경기부양을 위해 아무리 통화량(M)을 증가시키더라도 통화의 유통속도(V)가 하락하면 경기부양의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통화 유통속도는 1987년 5.1이었지만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2015년 0.7로 하락했다. 이는 경기침체의 요인이 통화량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통속도의 하락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화 유통속도 하락 원인은 부의 분배의 불균형, 실물자산(부동산 등)의 과도한 비중, 산업구조의 독과점화, 인구구조의 노령화 등 통화의 활발한 유통을 저해하는 애로요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1.5%까지 내려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통화유통의 동맥경화 현상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밀어두고, 부실대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유동성 부족만을 해결하겠다고 한국은행에 직접적인 양적 완화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한진해운이 심각한 경영난으로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한 지난달 27일 서울 영등포 한진해운 본사 로비에 직원들이 지나가고 있다. 정책당국은 해운 및 조선업 구조조정 재원 마련 명분으로 양적 완화를 추진 중이다. ©포커스뉴스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시작에 불과

정책당국은 해운 및 조선업 구조조정 재원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양적 완화를 추진 중이다. 국회에서 예산을 편성한 뒤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정통적인 방법이지만, 비상 시기이므로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시점이다. 해운과 조선업뿐만 아니라 철강, 건설 등 다른 산업도 상황이 만만찮다. 금융부문도 가계부채 과다에 따른 은행권 부실문제, 금리인하에 따른 보험업 자산건전성 위기 등 위험이 잠재돼 있다. 더욱이 향후에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위기가 닥친다면 정책당국은 매우 심각한 국면에 직면할 수 있다.

위기 초기부터 양적완화와 같은 극단적인 정책으로 대응하면, 추가적인 위기발생 때마다 양적완화로 계속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경제의 장기적·근본적 과제인 분배의 악화, 실물자산의 과다한 규모, 산업구조의 독과점화, 인구 노령화 등에 대한 재정 및 세제정책 마련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더 시급하다.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 단계다. 처음부터 양적완화와 같은 ‘독한 약’을 쓰면 나중에는 대응할 수단이 거의 없어진다. ©포커스뉴스

통화정책은 부작용 심각…신중해야

정부와 여당은 총선 전부터 양적완화를 정당공약으로 이슈화했고, 언론을 통해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도 실행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금융통화위원 7명 중 4명을 정부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교체하는 등 분위기로 봐서는 양적완화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양새다.

필자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경제를 급히 살리기 위해 극약처방을 쓴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양적 완화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경제가 위기상황일수록, 정책당국은 더 근본적이고 종합적으로 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정책결정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초기 위기부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정책시스템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정책을 법적 절차를 우회, 강행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어떤 경제 정책이든 직접적이고 강력한 효과가 있으면 그 반대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도 반드시 있다. 특히 통화정책은 풀린 통화량이 실물경제에 흐르면서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통화정책의 남용으로 신뢰를 상실할 때, 그 후폭풍은 더 감당하기 힘들다.

한국은행을 동원한 양적완화는 마지막 카드로 쓰되 전문가 집단의 공론화를 거쳐야 한다. 진지한 공론화 과정 중에 경제주체들은 대비하게 되고, 정상적인 대응을 하면서 양적 완화의 충격을 줄여나갈 수 있다. 정부의 정책도 신뢰가 구축되면서 경제 위기극복도 가능할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양원희]희]

 양원희

 (주)아이브인베스터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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