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우리 엄마 나이는 51세로 당시 친구들 엄마에 비하면 이미 할머니였다. 지금까지 가까운 친구 정(鄭)모군의 엄마가 당시 36세였는데 우리 엄마는 이미 그 3년 전에 손녀를 본 진짜 할머니였으니 아예 비교도 되질 않았다.

나는 친구들에 비해 나이 많은 엄마를 너무나 부끄러워 했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엄마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이 문제를 창피해하며 싫어하는 것은 마치 엄마에게 ‘왜 날 낳았느냐?’고 대드는 것처럼 후레자식 같은 망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로서는 매우 심각한 ‘고뇌’였다.

지난 2월4일 서울 금옥여고 졸업식에 참석한 학부형이 꽃다발을 들고 있다. ©포커스뉴스

1967년 3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부모회의가 있어서 부모님(주로 엄마였겠지만)이 학교에 갈 일이 생겼는데, 나이 먹은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결국, 그때 시집온 지 넉달여 밖에는 되지 않던 26세의 큰 형수가 엄마 대신 학교에 왔다. 

키 크고 늘씬한 예쁜 큰형수가 하얀 봄코트를 입고 교정을 휘저으니 학교에서는 일약 화제가 됐다. 최대한 불량해 보이려고 애를 쓴 듯한 고등학생들은 주둥이를 묘하게 잡아당겨 후익 후익~ 휘파람 소리를 내며 히야까시를 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도 앞다투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일견 미녀라고도 볼 수 있는 큰형수를 우리 엄마로 오해한 많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으로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이 마구 양산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의 첩’이라는 것이다. 중앙부처 공무원이 첩을 얻었으니 군사정부에 의해 곧 짤릴 거라고도 했다.

그후에도 형수는 몇번이고 우리 학교에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나의 거부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엄마가 느꼈을 비애가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 철딱서니 없는 자식은 엄마가 돌아간 지 20년쯤 지난 2006년,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야 겨우 깨달았다.

나이 많은 부모가 학교를 찾아오는 것이 그땐 왜 부끄러웠을까. ©픽사베이

나의 나이라든가 나의 하얗게 센 머리에 대해서 아들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특별히 내 앞에서 불만을 표출한 적은 없지만 그 몇 년 전엔 눈물로써 머리카락의 염색을 권했으며 웬만하면 같이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들이 그런 징후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2월, 아들 졸업식 날엔 비가 왔다. 운동장에서의 졸업식이 취소되고 반별로 교내방송을 통해 졸업식을 했다. 복도에 까치발로 서서 교실 안에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가… 가…”
픽 웃을 뿐, 계속 바라보고 있자 또 보냈다.
“제발 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또 안가고 버티자 또 보냈다.
“학교에서 나가 어린이집 앞에서 기다려.”

황당하고 화가 솟았지만, 계속 버티고 있다간 졸업식날 서로 불쾌해질 것 같아, 주차장에 가 있겠노라고 얘기하고 애엄마만 남긴 채 학교를 떴다. 한참이 지난 후 애엄마가 전화를 했다. 어린이집 앞에 있으니 그리로 오란다. 가보니 예상대로 ‘늙은 나 때문에’ 한판 붙어서 서로 부어 있었다.

기쁜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는데, 가는 동안 차 안에서도 ‘말도 안되는’ 설전이 계속 오갔다. 애비가 되어 할 말이 없을 리 없고, 교육적 가르침도 필요했겠지만 이날만은 아무 말도 않기로 작정했다. 또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처럼 보일 애비에 대해 ‘불만과 창피’를 느꼈을지도 모를 아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기 때문에 말을 잊기도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보니 아들과 찍은 그날, 졸업식 사진이 없다. 나 역시 엄마와 찍은 졸업사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때였다. 1988년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20년 가까이 지난 그제서야 너무나 미안해졌다. 부지불식간에 혀를 깨문 것처럼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웠다.

내가 졸업식에 오는 것을, 복도에서 까치발로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같이 사진 찍는 것을 아들이 왜 싫어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이유가 밝혀질 이야기도 아니고, 캐묻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내가 중학교 갈 때 엄마 나이가 51세, 10년 전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의 내 나이가 52세….

그 옛날 엄마에게 같은 종류의 아픔을 준 불효의 부메랑인 것을 아프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찌 그뿐이랴. 살아 계신 내내 갖은 불효를 했을 내가 아니던가. 살아 계셨다면 100살이 됐을 엄마를 떠올리며 가슴 저린 ‘어머니날’을 보낸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