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올해로 벌써 5·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이 되었다니 처음엔 나도 놀랐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하며 부르던 ‘통일 행진곡’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일제치하 36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광주시와 5·18재단의 초청으로 5월 16일부터 1박2일 동안 광주를 다녀왔다. 1980년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된 전직 기자 6명이었다. ‘5월 광주, 기억을 잇다 평화를 품다’는 주제를 내건 5·18 36주년 기념행사는 16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일정이었다. 하지만 △36주년 기념 내외신 기자회견과 △독일 언론인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식 등 주요 행사는 전반 이틀 동안에 잡혀 있었다.

5.18 내외신 기자회견을 마친 후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고승우 공동대표(가운데)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준범, 송정민, 노병유, 고승우, 박동영, 이희찬, 유숙열, 손정연, 전택원 전 기자. ©김준범

5·18 36주년 맞아 당시 해직 기자로 추모 일정 참여

16일 오전 8시 용산역을 출발한 광주행 KTX는 2시간 만에 송정역에 도착했다. 고승우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와 유숙열 기자(당시 합동통신), 박동영·이희찬 전 KBS 기자, 전택원 중앙일보 기자와 필자(TBC)였다. 송정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광주시 동구 금남로 4가역에 내렸다. 송정역은 필자가 80년 5월 25일 전주-정읍-장성을 거쳐 도착한 광주 최근접지로 당시엔 광주 시내까지는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출구를 나오니 목적지인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바로 나타났다. 80년 5·18 당시에는 가톨릭센터 건물이었고, 그 안에 기독교방송(cbs)이 있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불과 100m 거리다. 5·18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내외신 기자들의 회견장은 6층에 마련돼 있었다. 그곳에서 송정민·노병유 전 기독교방송(CBS) 기자와 손정연 전 전남매일 기자 등과도 합류했다.

외신기자로는 △브래들리 마틴(74·더 볼티모어 선) △팀 셔록(65·저널 오브 커머스) △노만 소프(70·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 △도날드 커크(78·시카고 트리뷴) 등 4명의 대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이들은 80년 5월 당시 광주 현지 상황을 국내 기자들보다 먼저 외부 세계에 보도한 미국의 언론인들이다. 당시 국내 언론은 계엄군의 철저한 통제와 사전 검열로 광주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오전 10시30분, 예정대로 ‘5·18 당시 내외신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 국내 기자들도 함께 참석은 했지만 질문은 주로 외신기자들에게 던져졌다. 질문의 내용도 36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사실관계 보다는 역사적인 평가 쪽에 비중을 두고 이뤄졌다.

어떤 기자는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물었고, 한국군의 움직임에 대한 주한미군 사령관의 책임을 따져 묻기도 했다. 4명의 외신기자들은 중간에 통역을 두고 36년 전 5월의 광주를 소상히 기억해 냈다.

기자회견 중인 브래들리 마틴, 도날드 커크, 노만 소프, 팀 셔록(왼쪽부터) ©김준범

당시 외신기자들 36년 전 광주의 5월 소상하게 설명해

브래들리 마틴은 80년 당시 시민군 대변인을 맡았던 윤상원 열사와의 인터뷰(1980.5.27)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인터뷰를 마친 지 몇 시간 만에 그는 계엄군에 의해 도청 현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마틴 기자는 당시 ‘더 볼티모어 선’ 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 흔치않은 곱슬머리였다. 내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미국인 치고는 아담한 체격의 노만 소프 기자는 “당시 기자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시신(屍身)을 직접 보고 사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정부는 시민들이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는 광주에 관해 떠돌던 수많은 거짓말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4명 중 최고령인 도날드 커크 기자는 “광주민주화 항쟁은 한국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팀 셔록 기자는 정보공개법에 따라 광주항쟁 관련 미 국무성 자료를 비밀 해제시켰고, 그 가운데 10여일 분을 재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공로로 광주시는 2015년 5월 21일 그에게 ‘광주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기자회견에 이어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의 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고승우 공동대표가 낭독한 성명서에서 참석 언론인들은 “‘80년 5월 광주’를 왜곡·폄훼하는 일부 세력은 반드시 엄단(嚴斷)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몇 년 전 일부 종편 TV에서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을 가리켜 북한 특수군이라고 왜곡,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실제로 금남로 ‘5·18 기록관’ 입구에는 ‘북한군’ 운운하는 지만원 씨의 주장과 이를 반박하는 내용의 사진을 비교, 전시해 놓고 있었다. 지 씨는 80년 5월 광주민중 항쟁 당시의 사진에 나타난 인물을 북한에서 온 누구라고 실명을 거론하며 북한군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모 방송과 탈북자 단체에 의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은 2013년 국회 본회의에서도 이미 검증된 바 있다.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는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고 분명히 답변했고, 국방부도 “5·18민주화 운동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표지석 앞에 나란히 서서 묵념을 올리고 있는 미망인과 윤장현 광주시장. ©김준범

당시 참상 세계에 최초로 알린 힌츠페터 추모제 망월동 구 묘역서 열려

16일 오후에는 망월동 5·18 구 묘역에서 특별한 추모제가 열렸다. 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8~2016)의 표지석 제막식과 기념정원 조성식이 그것이다.

힌츠페터는 독일 제1공영방송(ARD TV) 소속 촬영기자였다. 1980년 당시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중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광주에 들어가 민중항쟁 전말을 상세히 필름에 담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다. 광주의 참상을 담은 그 필름(‘기로에 선 한국’)은 즉시 독일에서 방송됐고, 80년 9월에는 한국 내 일부에서 극비리에 상영되기도 했다.

이어 2003년 5월 18일에는 힌츠페터가 죽음을 무릅쓰고 필름에 담아 둔 광주의 참상이 KBS 1TV를 통해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라는 제목으로 방영돼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힌츠페터는 그 후 서울 광화문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현장 등을 취재하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골절상 등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5·18을 직접 목격한 외신기자들의 증언록에서 힌츠페터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참상을 봤을 때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슬픈 광경을 최대한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취재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난 1월 25일 독일에서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생전에 채취해 놓은 손톱과 머리카락을 이날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한 것이다. 힌츠페터는 자신을 국립 5·18민주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으나 안장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망월동 묘지에 안장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망월동 묘지는 5·18 당시 맨 처음 조성된 묘지로 나중에 국립 5·18민주묘지가 완공돼 옮겨가기 전까지 5월 희생자들이 안장됐던 곳이다.

이날 추모제 행사에는 힌츠페터의 미망인인 엘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79) 여사와 그 여동생, 사나나 구스마오 전 동티모르 대통령과 브래들리 마틴 등 4명의 언론인들이 참석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브람슈테트 여사와 가끔 귀엣말을 나누고 위로의 제스처를 취하는가 하면 구스마오와는 잦은 스킨십을 하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올해 70세인 구스마오는 1999년 사하로프 인권상에 이어 2000년엔 제1회 광주인권상을 받은 바 있다. 50cm 크기의 힌츠페터 표지석에는 그의 얼굴과 이름, 기사 내용 등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나이로 80 고령인 미망인의 표정은 행사 내내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그녀는 “80년 5월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학생, 시민들이 안장된 망월동 묘역에 함께 묻히는 게 남편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고인의 바람대로 역사적인 장소에 모시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어 5·18기록관에서는 내외신 기자 및 시민 학생들과의 생생 토크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80년 5월의 광주를 묻는 중·고,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윤장현 광주시장과 중고 및 대학생,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망월동 묘지 전경. ©김준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기대했다가 자탄하기도

광주에 있는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은 때마침 현안으로 떠오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광주 시민들은 오전까지만 해도 크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3당 원내대표들의 일관된 요청과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화답으로 광주시민들의 기대는 한껏 고취돼 있었다. 그러나 16일 오후 박승춘 보훈처장의 발표를 계기로 시민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박 대통령을 믿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다’며 자탄하기도 했다.

우리는 80년 5월 당시 시민군이 잠시 장악했던 전남도청 건물과 그 앞 대형 분수대가 있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도청 건물은 또 다른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개관을 앞두고 있고, 그 뒤쪽으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들어서 있었다. 도청 옆 경찰서 건물도 그대로였고, 광장 오른편에 있던 유도 체육장인 상무관도 헐지 않고 보존돼 있었다.

상무관은 80년 5월 당시 광주 일원에서 총에 맞거나 대검에 찔려 죽은 시신들을 수거해 장례식장처럼 사용했던 곳이다. 상무관을 바라보니 36년 전 현장을 취재하던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 후 필자는 몇 달 간이나 잠을 이루지 못해 못 먹던 소주를 마시고 취한 다음에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나의 첫 번째 트라우마였다.

도청 앞에서 금남로로 통하는 광장 입구 쪽의 대형 분수대도 그대로였다. 당시 이곳 분수대는 10만명을 헤아리는 광주시민들이 매일같이 모여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던 대표적인 집회 장소였다. 그날따라 분수대는 유난히도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36년이 지나도 풀지 못한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한(恨) 때문일까. 두 겹, 세 겹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분수들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또 치솟기를 반복했다. 파란 하늘 위로 5월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의 눈물이 흩뿌려지는 것만 같았다.[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전 중앙일보 통일외교팀장,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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