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소설의 힘일까. 번역의 힘일까.’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번역이 원작의 완성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의 ‘맨부커상’을 수상한 걸 두고 하는 얘기다.

그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후보는 몰라도 수상작까지 된 것은 솔직히 좀 의외였다. 작품성을 과소평가해서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대중적 인기를 끌지도 못해서도, 소설이 나오고 2년 뒤에 선보인 영화가 인간심리에 대한 섬세함을 잃고 시각적 자극에 빠져 원작에 관심이 떨어지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10년 전,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섬세하면서도 섬뜩하고, 아프면서도 슬픈 느낌은 아직도 여전하다. 연작형식인 ‘몽고반점’과 더불어 소설가 한강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이렇게 문학성을 인정받으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더구나 11년이 지났다. 작가가 ‘그 시간을 건너서, 먼 곳에서 상을 받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할 법도 하다.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오른쪽)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16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게티/포커스뉴스

번역은 ‘제2의 창작’

한편으로는 충분히 수상작이 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창동이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칸이나 베니스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고 수상한 것처럼. 유럽인들의 시각으로는 같은 주제이지만 그들의 영화나 한강의 소설의 소재, 표현 양식이 그들로서는 상상조차하지 못할 독특하면서도,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영상예술인 영화는 언어가 달라도 그 자체로 세계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지만 글로만 표현되는 문학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 작품이라도 그 나라의 언어적 감성과 감각으로 되살리지 못하고 단순 번역만으로는 향기와 느낌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한다. 문학에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비영어권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이 번역자까지 나란히 수상자로 선정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창작 못지않은 역할을 한 ‘채식주의자’의 번역에 대한 맨부커상 심사위원단의 평가와 번역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단은 공식적으로 “완벽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턴킨 위원장은“매순간 아름다움과 공포가 묘하게 섞인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평가했다. 작가 한강도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20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다”면서 “언어의 섬세함에 감탄했다”고 번역자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그런지 번역된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설령 짧은 영어실력으로 읽어본들 떠듬떠듬 해석하는 수준일 테고, 아무리 영어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 정서와 느낌이 같을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이 평가하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17일 서울 서초구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한 독자가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포커스뉴스

번역가가 공동수상자인 이유

맨부커상은 영문판 ‘채식주의자’에 대해 “영어로 완전히 제대로 된 목소리를 갖췄다”고 했다. 영문학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평가 못지않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변역자가 영어를 아주 잘하는 한국인이 아닌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인이란 사실이다. 그것도 불과 6년 전에 문학번역가를 꿈꾸며 한국어를 독학으로 시작한 28세의 젊은 여성 데보라 스미스였다.

그녀는 ‘채식주의자’를 단순히 번역하지 않고 작품의 ‘리듬’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번역은 ‘시인의 작업’과 비슷하다는 그녀의 철학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국 BBC도 “훌륭한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있다면, 그 번역은 영문학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인용하면서 “번역가가 상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채식주의자’의 수상은 한국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 만약 번역이 엉망이었다면, 영국인들에게 ‘채식주의자’가 독창적이고 치밀한 구성, 심리묘사를 가진 소설로 비춰질 수 있었을까. 만약 데보라 스미스가 아닌 한국인에게 번역을 맡겼다면 영국인들이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까.

번역은 좋은 작품이 있어야 하고, 이를 작가 못지않은 창의성과 열정을 가진 번역자가 나와야 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문학에 젊고 좋은 작품은 많다. 번역자들도 많다. 그런데 대부분 외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맡거나 한국인과 외국인 공동작업에 맡긴다. ‘채식주의자’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외국소설의 국내 출판을 보면 그 의문은 당연하다. 일본소설을 국내에 출판할 때 누가 번역을 하는가.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인가, 일본어를 잘 아는 한국인인가. 소설이든, 영화든 번역은 원작의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아니라, 번역되는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한다.

©픽사베이

번역은 누가 해야 하나

그런데 한국소설을 외국어로 출판하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를 알고,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고, 문학적 감각까지 가진 데보라 스미스 같은 번역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외국어 잘하는 한국인에 매달리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그런 번역가를 찾고 길러야 한다. 외국 독자에게 한국문학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언어로 작품의 맛과 멋을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는 모국어 번역가가 필요하다. 그들이야말로 한국문학, 나아가 한국문화를 세계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동반자이자, 작가이다.

이제는 국제도서전의 한 코너를 거뜬히 채울 만큼 한국문학의 해외번역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우수하다고 할 만한 번역’은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단어의 뜻조차 엉뚱하게 바꾸는 엉터리 번역, 멋대로 번역, 독해시험 보듯 단순한 직역으로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는 경우도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문학까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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