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어떤 가수든 자신의 대표곡이 있을 것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그 대표곡을 과연 몇 차례나 부르게 될까요? 너무 많이 불러서 가수 본인으로서는 지겹고 식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불후의 명곡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가수 이난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가수 이난영의 경우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무대 위에서 과연 몇 번이나 불렀을까요? 아마도 수천 번은 훨씬 상회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동순

본명이 이옥순이었던 이난영은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나 7살에 북교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많았고, 4학년이었던 1929년 기어이 중퇴하고 말았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가난을 물려받은 집에서 홀어머니는 자녀양육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머니는 제주도로 식모살이하러 떠났습니다. 막내가 걱정되었던 어머니는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함께 제주로 건너갔지요. 일본인 극장주의 집에서 옥순의 어머니는 식모를 살고, 어린 옥순이는 집주인의 아이보기, 걸레로 마루 닦기 등을 보조했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자주 라디오와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이것을 어느 날 집주인이 들었던 것입니다. 옥순의 특별한 재주를 알게 된 집주인은 일본의 삼천(三川)가극단이 제주로 공연 왔을 때 소개해서 막간가수로 무대에 오르도록 했습니다. 이때가 이난영의 나이 16세 때로 첫 무대 데뷔였던 셈이지요.

이난영의 노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이로부터 이난영은 삼천가극단 정식 멤버가 되어서 일본으로 순회공연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가극단 대표의 착취로 말미암아 이난영의 삶은 여전히 곤궁하고 고달팠습니다. 삶을 비관하게 되었을 무렵, 마침 일본방문 중이었던 작사가 강사랑의 눈에 띄어 서울 오케레코드사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오케 전속가수가 된 이난영은 첫 작품으로 춘향전을 테마로 한 ‘불사조(不死鳥)’를 발표해서 대중들에게 잔잔한 감동의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애절한 창법과 눈물의 여운이 감도는 성음의 울림은 듣는 이의 가슴속에서 슬픔의 근원을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드디어 1934년 운명적인 노래 ‘목포의 눈물’이 이난영에게 다가왔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향토가사모집에서 1등으로 당선한 목포 청년 문일석의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가수 고복수에게 이 노래를 부르도록 미리 결정을 해둔 상태였는데, 작곡가 손목인의 반대로 이난영이 부르게 되었지요. 그 까닭은 노래의 공간배경이 된 장소에서 태어난 가수가 아무래도 더욱 절절히 노래를 소화시켜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난영은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 가난과 고통 속에서 힘겨웁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유장한 판소리가락과 육자배기의 울림, 진도아리랑의 깊은 파장을 함께 엮어낸 창법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전문

울음인가 하면 어느 틈에 그 울음을 이겨내는 결연한 끈기가 느껴지고, 하소연인가 하면 슬그머니 그 하소연을 성큼 뛰어넘는 우뚝한 걸음걸이로 저만치 앞서가는 남도 특유의 음악적 파장이 뭉쳐지면서 전체 한국인의 가슴 속에 단단하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하여 ‘목포의 눈물’은 이제 한국인의 중요한 민족적 무형문화유산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이난영하면 먼저 ‘목포의 눈물’, 목포란 도시를 떠올리면 저절로 이난영의 이 노래를 떠올리는 이신동체(異身同體)적 두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난영의 삶은 굴곡과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작곡가 김해송과 부부가 되어서 무려 8남매의 자녀를 출산하였지만 넷을 질병으로 잃었지요. 남편 김해송은 광복 직후 KPK악단을 조직해서 미군부대 위문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 때문에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김해송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고 이난영은 졸지에 생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운영하던 악극단도 경영난으로 해체되고, 이난영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가수로 키워볼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딸아이들을 미국으로 진출시켜 가수로 성공하도록 이끌었는데, 그 딸들이 김시스터즈란 이름의 여성보컬입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이난영의 삶은 나날이 고독하고 황폐해져 갔습니다.

1958년 서울 명동의 시공관 무대에서 고복수 은퇴기념공연이 열렸을 때 이난영은 무대에 올라 ‘목포의 눈물’을 열창했습니다. 말이 열창이지 이난영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낌이 들어있는 애처로운 발성으로 노래를 아슬아슬하게 펼쳐 갑니다. 특히 2절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란 대목에서는 아예 흐느낌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불러갑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그날의 주인공 고복수가 곁에 다가와 함께 도와서 겨우 마지막까지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날 불렀던 ‘목포의 눈물’은 녹음실황으로 남아서 지금도 우리가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난영은 무려 수천 번 이상 ‘목포의 눈물’을 무대 위에서 불렀을 터이나 이날 부른 노래가 단연코 최고 절창이 아니었을까 판단해 봅니다. 이난영으로서는 가요계를 아주 떠나는 선배가수 고복수의 은퇴도 슬펐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다가온 삶의 파란곡절과 가파른 운명에 대한 슬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흐느끼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었겠지요.

우울과 고통으로 술과 마약에 빠지기도 했으나 오케레코드사 시절의 동료 남인수와의 불가해(不可解)한 사랑은 한때 삶의 새로운 생기를 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인수의 건강은 이미 결핵 3기를 넘어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 있었지요. 3년 동안 극진한 간호로 보살피며 회생시키려 노력하였으니 기어이 남인수는 1962년,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임종 순간에 남인수는 이난영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 부탁했고, 이난영은 흐느껴 울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남인수의 이마에 뚝뚝 떨어졌을 것입니다. 넓고 넓은 세상에 오로지 홀로 남은 이난영의 삶은 드디어 절박한 우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65년 어느 날, 이난영은 극도의 우울증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란 타이틀로 전국적 규모의 가요동호인 모임을 만들어서 출범한지 어언 4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회장을 맡아서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요사에 해박한 식견과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여러 회원들이 있어서 ‘유정천리’ 활동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유정천리’에서는 그간 우리 옛 가요를 새로 찾아내고,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선양하는 일을 주로 해왔습니다. ‘유정천리’는 남들이 전혀 해내지 못하는 참 많은 어렵고 힘든 일들을 거뜬히 수행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성과로 자부할 수 있는 것은 가요황제 남인수의 CD 대전집을 12매로 제작해서 발간해낸 일입니다. 그 밖에도 이애리수, 강석연, 이부풍 등 우리 가요사의 대표적인 가수, 작사가, 작곡가의 작품들을 엄선해서 수시로 발간해왔습니다. 최근에는 가수 이난영의 전집을 무려 9장 규모의 CD로 기획제작하고 가사와 해설까지 붙인 성과물을 발간해서 많은 찬사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부의 대중문화담당부서와 기관에서 전담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민간단체에서 이런 일들을 당당히 해내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지요? 앞으로도 ‘유정천리’의 활동에 대해서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난영 생가 ©이동순

한 가지 안타깝고도 아쉬웠던 점은 가수 이난영의 고향 목포시에서 전혀 아무런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입니다. ‘유정천리’에서는 여러 차례 전집발간 계획과 연대를 목포시에 공식적으로 제의했으나 종내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목포 출신의 가수를 전집으로 엮어내는 모습이 별반 마음에 유쾌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런 사업은 지역과 명분을 떠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가 함께 힘을 모으고 참여해야할 사업일 텐데도 말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행보가 숨 가쁘고 벅차게 느껴질수록 우리는 발걸음의 급박한 템포를 한 단계 조절하면서 스스로의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이러한 시간에 지난날 이난영이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의 격랑을 조절해보려는 애타는 과정에서 울먹이며 불렀던 ‘목포의 눈물’에 귀를 기울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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