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협상은 제안자가 우위인 상태에서 제안할 수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제안자의 위치의 우열이 기준이 되면 상대편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기가 어렵다. 상대편이 제안자의 의도를 파악해 대응책을 세울 때까지 그 제안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월 21일 북한 인민무력부가 남측에 전통문을 보내 남북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제의했다. 이 제안이 전자에 해당될지 후자에 해당될지는 불분명하다. 전자와 후자가 얽혀 있지만 정황상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달 21일 조선중앙TV에서 북한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가 남북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우리 군 당국에 제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의 군사회담 제안은 유엔의 제재 국면 전환 위한 위장평화 공세

우리 측이 이틀 뒤 ‘비핵화가 선행되지 않는 군사회담은 무의미하다’며 대화를 거절한 것에 대한 북측의 대응에서 그들의 조바심을 보게 된다. 북측은 우리가 거절 답신을 보낸 다음날인 24일 어처구니없게도 똑같은 내용의 전통문을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보내왔다.

북이 상식이 있는 집단이라면 최소한 두 번째 전통문에서는 ‘비핵화든 뭐든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라고는 했어야 대화를 하겠다는 자세다. 저들의 막무가내 식 협상자세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스토커 식의 제안은 전례가 없는 모습이다.

북측이 허둥대는 모습은 또 있다. 지난 달 20일 이후 국방위원회의 공개서한, 인민무력부의 통지문에 이어, 김기남 노동당중앙위 부위원장, 원동연 조평통서기국장, 김완수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장 등이 잇달아 담화를 발표해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거부의 답장을 보낸 것이나 두 번째 통지문에는 아예 답변조차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대화의 의도를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예상됐던 것이지만 대화를 거절당한 북측의 반응은 더욱 거칠고 신경질적이다.

‘지금은 북한과 대화를 언급할 때 아니다’고 한 통일부 대변인의 발언을 겨냥해 통일부 장관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미국에 대해서는 ‘마지막 경고’라며 ‘선제적 핵보복 타격의 대상이 되어 행성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운운하는 공상영화 수준의 국방위 정책국 담화를 내놨다.

5월 27일 우리 해군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어선과 단속정에 경고사격을 가하고 퇴각시킨 사건에 대해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다음날 통첩장을 보내 우리 함정이 그들의 영해를 침범했다고 억지 주장을 펴면서 앞으로는 그럴 경우 경고 없이 조준사격하겠다고 협박했다.

©포커스뉴스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상황에서 북한이 남북군사회담을 제안한 것은 무엇보다 유엔 대북제재의 압박을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거기에 36년만의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당위원장에 오른 그가 자신의 새로워진 위상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이용하겠다는 저의도 보인다.

당대회를 결산하는 총화보고에서 김정은이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책임 있는 핵보유국’천명이었다. 그는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지 않겠으며 비확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김은 남북군사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가 남쪽의 동포를 겨냥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선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남한에 대해서는 무력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면서 국제사회에는 북핵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선전하려는 의도다. 핵무기 보유로 군사력에 여유가 생겼다는 듯이 병력감축 등 군비축소를 들고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 모두 유엔 제재국면의 전환을 노린 위장 평화공세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은 이런 일거다득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당과 내각에 불호령을 내린 것 같다. 당과 정부의 대남선전기관들이 총동원 돼 동시다발적으로 대화공세를 펴는 것은 김정은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충성 경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북의 말을 믿어줄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핵사용을 않겠다지만 ‘제국주의의 핵위협과 전횡이 계속되는 한 경제와 핵무력 건설을 병진하고,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겠다’는 것이 총화보고의 핵심이다.

우리는 더 믿을 수 없다. 대화제의 직전까지만 해도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폭격해 파괴하는 영상을 TV에 방영하면서 ‘서울 불바다’를 외치던 그들이다. ‘핵무기를 언제든 쏠 수 있게 하라’ ‘7일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게 하라’ ‘해방 전선을 구축하라’며 군부를 향해 대남전쟁을 고취하던 김정은이다.

더욱이 그들은 과거에도 대화제의 뒤에 도발 의도를 숨긴 경우가 많았다. 당대회 중에 실시할 것으로 예상됐다가 미루어진 5차 핵실험을 실시하거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더 직접적인 도발 가능성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31일에는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나 지난 4월 이후 네 번째였던 이번 미사일발사 역시 실패해 망신만 샀다.

한쪽에선 남북 대화를 제의하고 돌아서면 협박을 일삼는 북한은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나 북측을 무시하기 보다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거짓과 모순을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픽사베이

그렇더라도 남북 대화에 응해 북측의 거짓과 모순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해야

이런 상황에서 불쑥 내 건 군사회담제의다. 그러나 북측의 핵에 대한 집착으로 미루어 우리가 ‘선 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것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와 같다. 그것은 자칫 국제사회에 한국이 대화를 회피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북측과의 대화는 저들의 거짓과 모순을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되어야 한다. 김정은이 당대회에서 핵과 경제의 병진론, 연방제 통일, 주한미군철수 등을 주장한 것을 두고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로 회귀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 가운데는 한반도 비핵화도 포함돼 있었고,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인정한 사실을 김정은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있다.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북한이 미국을 상대하기가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도 전해줘야 한다. 아마도 트럼프는 북한의 핵시설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들려줘야 한다.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빼고 대신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개발 용인의사를 밝힌 내용도 전해주고, 남한이 핵무기를 갖기로 말하면 그들의 핵무기는 조족지혈에 불과함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그 원인이 된 북핵을 중국과 러시아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된다는 점도 알려줘야 한다. 북한이 소망하는 인도 파키스탄 식의 핵보유가 인·파 양국 간 적대관계가 완화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얘기도 들려줘야한다.

이 중에 한마디라도 저들의 귀에 걸치면 회담은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도저도 듣지 않거든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라면 이산가족 상봉 회담이 더 시급하다는 얘기를 하고 회담장을 나오면 된다. 북한의 속셈이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굳이 군사회담을 회피할 것은 없다.[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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